2019년 1월 23일 수요일

죽은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문화에서 산자가 죽은 자를 지배하는 문화로의 변혁을 꿈꾸며



지난해 2002 9월의 사건이었다. 전명순권사님의 모친 장례식엘 다녀왔다. 10시에 평촌 한림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예배를 드리고, 버스로 벽제화장터를 향해 출발했다. 고인이 화장을 유언으로 남기셨기 때문이다. 예배를 마치고 11시 되지 안아서 출발했는데, 길은 막히지 않고 뻥 뚫렸다. 길이 막힐 것을 염두에 두고 일찍 출발한 것인데, 12시 조금 넘어 벽제에 다다랐다. 관리소에는 화장 예약을 14:40으로 잡아 놓은 상태라, 중간에 시간이 붕~ 떠서 아주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화장장은 차로 넘쳐나서 시간 전에 가봐야 차댈데도 없고, 화장을 미리 당겨서 할 수도 없었다.(참고로 서울 인근에 화장장은 벽제 한곳 밖에 없다. 벽제 화장터가 하루 처리할 수 있는 화장건이 60여건이라고 하는데 벽제화장장은 많을 때는 하루 100여건도 처리한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일정이 빡빡하다는 소리다)
그 때 전권사님과 언니가 사태수습에 나셨다(이 두분은 다 권사님이시다. 물론 고인이 되신 모친도 집사님이셨다). 점심때도 되었고, 또 문상오신 분들의 시간 활용을 위해서도 지금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화장터로 가면 좋겠다는 안(
)을 낸 것이다. 영구차를 운전하는 기사분이 "
그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고인을 버스에 모신 채 식당 앞에 차를 대고 식사를 하는 것이 좀.. ...하지 않느냐
"
고 하시면서 조금 꺼림직해 했다. 그러나 두 권사님의 결정으로 기사분은 웃으시면서 "
유족들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죠뭐
"라고 그 결정에 따랐다.
곧 차는 화장터 근처 식당에 파킹이 되었고, 문상객들은 다들 내려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나무 그늘 밑에서 쉬었다가 화장장을 들어가서 장례를 여유있게 치르고 돌아왔다.
나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두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치러지는 장례와 불신가정에서 치러지는 장례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벽제 화장터는 시간마다 처리되는 화장으로 수많은 문상객과 유족들이 넘처나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믿는 가정의 장례예배가 드려지는 바로 옆에서 불신가정의 장례가 진행되는터라 두 장례가 극명하게 비교가 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믿음의 가정에서 드려지는 장례예배는 고인을 천국으로 먼저 보내는 잔치 비슷한 분위기인 반면에, 불신가정의 분위기는 통곡을 하고 오열을 하는 등... 가는 자나 보내는 자나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해 한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
예수 믿고 죽는 것이 고인에게나 유족에게나 정말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를 느꼈는데, 그것은 문상객들 점심을 먼저 먹이기로 결정하는 두분 권사님의 태도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우리나라, 특히 동양문화권은
불교와 유교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이 문화권의 문화는
'죽은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문화이다.
죽은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사상에 근거를 둔 수많은 제사와 규례들이 살아 있는 후손들을 옭아매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뭔가 결정하고 절차를 정하는데 죽은자들이 그 결정의 첫 번째 고려 변수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 예수 믿지 않는 집안에서, 영구차를 식당 앞에 세워두고 문상객들에게 밥을 먹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정은 고인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기에 충분한 일이다. 사람들이 왜 욕을 해댈까? 그들은 바로 죽은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문화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분 권사님의 태도는 달랐다. 그분들은 복음과 진리로 무장되어 있는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분들은 죽은자와 산자를 동시에 배려하되 죽은자가 산자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중에는 불교적 기독교, 유교적 기독교,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믿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분인데... 막상 얘기를 나눠보면 사고방식과 세계관/가치관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 불교, 샤머니즘에 더 가까운 분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적어도 이 두분 권사님은 아니었다. 믿는 가정의 장례식장에서도 죽은자를 배려한다는 명분하에 성경의 세계관/가치관을 잠시 덮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두분 권사님처럼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처음봤다. 이 두분 권사님의 결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건 단순히 시간활용문제나, 밥 빨리먹는 문제가 아니었다.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유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효는 죽은 조상을 잘 모시는 측면이 강한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는 철저하게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죽은 조상 잘 모시라고 만들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부모님 살아실제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고난 뒤 초호화판으로 제사를 지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한국전통적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은 제사를 꼬투리 잡아 기독교는 아래위도 없고, 효가 뭔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종교라고 몰아붙인다. 이건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들이 오해를 한 결과이다.
환갑이 넘으신 두분 권사님이 5년동안 모친의 병수발을 하면서 효도를 한 것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하다. 혹시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고인을 먼저 하나님 품으로 보내는 두분 권사님의 여유있는 태도를 보면서 예수 믿는 것의 묘미가 바로 저런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한 제자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 때 그 제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참 의미있는 답변이다. 죽은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문화를 뒤집어 엎으시고, 산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도록 권면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우리는 산자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다.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여~
죽은 귀신한테 잘보여서 복받을 생각이랑 아예 말고,
부모님 살아실제 잘 하자...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따르라!
온 세상이 성경과 하나님나라 가치와 세계관으로 뒤바뀌는 것을 꿈꾸며 - 2002.9.29 서요섭목사 -

인재등용에 대한 소고



군대 있을 때, 군이라는 조직의 인사정책이 얼마나 비능률적인가를 절감한 적이 있다. 군은 국가안보와 유사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기관이다. 군조직의 군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여러가지 능력들이 있다. 작전수립능력과 실행능력, 조직장악, 무기와 장비에 대한 이해, 병사들의 마음을 살 줄 아는 리더십.. 그러나 장교의 능력 중 가장 우선시 되어야할전투지휘능력이다. 그런데 내가 군대 있을 때 장교들의 모든 관심사는 오로지어떻게 하면 사고를 줄일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무리 탁월한 실력과 전투지휘, 작전수행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자기가 맡고 있는 부대에서 구타사고, 총기사고, 교통사고 등등... 사고가 일어나면 엄청난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장교들이 전투지휘능력을 개발하거나,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증진시키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고나지 않는 쪽으로 훈련을 진행하고 병들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 내가 모시고 있던 중대장 최재철대위에게위관급 복무기간 중, 책임 중대에서 사고가 몇건 터지면, 영관급으로 승급되는 것은 꿈도 꾸지 말고 예편하는게 차라리 낫다는 자조 썩인 말을 들었다. 실제로 우리 중대원이 교통사고를 일으켜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후 6개월만에 중대장님은 장기복무를 취소하고 대위로 예편해버렸다. 전투지휘능력과 리더쉽을 갖춘 한 장교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참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중대장으로 부임해온 엄대위는 훈련엔 도통 관심없고 사고내지 않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볼 때마다 어떤 사람이 그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나 하는 점보다는 결격사유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인선되는 경우가 많다. 업무수행능력보다 사고 덜 치는 사람으로 인사정책이 시행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고위공직자인 만큼 고도의 도덕성과 청렴결백을 요구한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승냥이떼들이 몰려들 듯이 달려들어 실력은 있지만 결격사유가 발견된 리더를 가처없이 물어뜯어버린다.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이 걸고 넘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과연 그들 자신은 얼마나 이런 문제들에서 자유로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정권 바뀌면 한나라당 자기들이 들이댔던 잣대가 부메랑으로 날라올텐데..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고 내뱉는 말들이 가관이다.
물론 국가 최고 지도자들을 인선하는데는 높은 도덕성과 투명한 자기 관리, 건전한 가정(자식과 마누라가 일을 저지르더라도 책임은 남편과 아버지가 진다) 등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업무수행능력 즉 실력보다 더 우선으로 고려될 수는 없다. 가정도 좋고 도덕적 결함도 없고, 과거도 깨끗한 사람을 세우면 최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제는 모든 면에서 깨끗하고 실력도 탁월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문제다. 누구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결격사유가 발견될라치면 욕만 퍼부어 덴다. 이래가지고서는 리더가 세워지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도 2차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했어야 된다고...
2차 대전이 끝난 후, ‘자유프랑스드골정권이 설립된다. 드골정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2차대전 중 독일 Nazis(나찌)에 빌붙어 Vichy(비시)정부에서 부역한 인사를 모조리 숙청하는 일이었다. 한명도 열외없이 끝까지 추적하여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해방 후 한국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 신탁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북한에는 김일성정권이 남한에는 이승만정권이 설립되었다. 김일성정권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친일잔재세력을 모조리 처단했다. 그러나 남한정부는 친일세력이 그대로 국가 지도세력으로 남게된다. 물론 미군정이 남한에 공산주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나마 쓸만한 실력있는 부류가 친일세력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우리 역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과거진상은 먼저 밝히고, 용서할건 용서하고 책임을 물을건 묻고 사면할 건 사면하고, 복권시킬건 복권시키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제와서 밝혀봐야 뭐하냐.. 서로 상처만 들추는거지..그냥 덮자는데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잘못을 밝힌다음에 거국적으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며 과거를 털고가자는데... 이거 왜 이르셔... 물론 이런 과거역사청산을 국내정치 특히 선거에서 이용해먹으려는 못된 놈들이 걱정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2차대전 종전 후 프랑스와 한국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너무나 아쉬운 것은 이점이다. 프랑스는 비시정부에 부역한 세력을 숙청하더라도 드골정권 하에 프랑스 재건에 동참시킬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친일세력을 청산하면 국가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인재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력Pool이 크지 않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논리를 주장하며, 친일세력을 그냥 받아들이고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채 자기존재이유를 내세워 문제를 덮어버리고자 하는 아주 못된 논리다.
아무튼
여러분 같으면 어떤 사람을 당신의 지도자로 선출하겠는가?
1.실력도 있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재
2.실력은 있지만 도덕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사람
3.실력은 없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
4.실력도 없으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
물론 1번이 최선이다. 그러나 문제는 1번에 해당하는 인물이 별로 없다는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럼 차선은 2번 아니면 3번인데 내 개인적으로는 3번보다는 2번으로 가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된다. 1번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는데 2번을 자꾸 걸고넘어지면 결국 3번이 선출될 수밖에 없다. 1번이 없으면 일단 2번을 뽑고, 2번을 도덕적으로 깨끗하도록 감시하고, 3번은 실력을 키울 수있도록 훈련시켜 2,3번이 1번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4번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간절히 바라기는 내 자신이 먼저 1번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왕이면 교회를 통해 1번에 해당하는 거룩한 리더십이 양산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어제 가족회의 결과



안건: 딸네미 학교에서 지우개 때문에 친구와 싸운건 처리
내용: 공룡모양 지우개를 갖고 있었는데 책상에서 떨어졌다. 수업마치고 찾으려고 했더니 뒤자리에 앉은 녀석이 버젓이 지우개를 쓰고 있었다. ‘그거 내꺼 아냐?’라고 물었더니니꺼 아냐, 내꺼야!’라고 해서 실랑이가 붙었다. 한별이 말로는 공룡머리 모양 뭉게진 것을 보니 자기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옥신각신하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압수당했다고 한다.
엄마의 해결책: ‘지우개를 반으로 잘라라라고 판결을 내려서 친구가쪼개라!’라고 우기고 한별이는아니되옵니다(울먹거리면서...) 차라리 지우개를 친구한테 주옵소서라고 말하면, 선생님이이 지우개는 한별이 것이었구나..’라고 최종 판단을 내려서 해결된단다....
울 한별이 엄마의 판결을 듣고선 엄마가 솔로몬이냐며... 한참을 웃었다.
아빠의 해결책: ‘이거 니 지우개 맞어, 진짜야? 정말이지..’라고 3번을 진지하게 물어본다. 그래도 친구가 자기 꺼라고 우기면, ‘그랬구나.. 니꺼였구나. 미안하다. 난 생긴게 똑같아서 내 지우개인줄 알았어라고 사과하고는 뒤돌아서면서 이렇게 한마디 던진다. ‘내 지우개 화장실에서 빠뜨려 똥뭍었는데.. 버리려고 했더니...내꺼 아니구나..’ 그 때 아무 반응없이 친구가 지우개를 쓰면 진짜 그 친구꺼 맞다. 반면에에이.. 더러라고 하면서 지우개를 던지거나 버리거나 돌려주면...... 의자를 들고 찍어버린다.
울 한별이 아빠의 판결을 듣고선아빠! 진짜 의자들고 찍어요?’,
아빠 왈아빠는 니 만할 때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우리 한별이 눈이 똥~그래졌다.
우리 집사람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목사다. 하나님 자녀이기도 하지만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었지 않은가... 지금도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마다 옛날 방식의 문제해결책을 떠올리곤 한다. 내 직업이 목사가 아니었으면 할... 때가 몇 년에 한번씩은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문제해결 Simulation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011.7.12

사람 보고 시달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도 정당한 Agenda setting하기




절대우위를 목표로 설정하고 달려가야하지만 비교우위만 되더라도 남는 장사를 할 수는 있는 것이 현실세계다. 그러나 이 대상이 재화나 상품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용하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는 꼭대기에 있는 나무가 목표였던 반면에 토끼녀석은 경쟁상대인 거북이를 바라보았기에 결국 망했다. Agenda setting을 할 때,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게 정당한 목적/가치/목표를 설정해야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사람과 비교를 통해 주어지는 것은 택도 아닌 교만과 쓸데없는 열등감 뿐이다.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칭송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정당하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때가 있다.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추켜세우는데 양심에 손을 얹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패인 경우가 있단 말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실패라고 욕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당당하기에 성공인 경우도 있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처럼 거울을 쳐다보며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젤루 이뿌냐...?’며 씨잘데없는 질문을 던져놓구선 백설공주 때문에 비교열위에 빠져 한을 품는 멍청한 짓은 이제 그만둘찌어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염두에 두고 시달리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위해 자신을 억누른 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인생 망친 사람들....사람들의 평가와 여론을 참고는 하되 시달릴 이유는 전혀 없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그리고 내 양심에 거리낌 없는 선택과 결정으로 후회없는 생을 살면 그만이다. 누가 뭐라 그러던 말든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내 길을 가련다. 이 길이 결국 God will make a way..(Don Moen목소리로..ㅎㅎ) my way(Frank Sinatra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