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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7일 목요일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Rene Girard의 폭력과 성스러움(Violence and the sacred)를 읽고 있다. 문학 Text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역사와 신화, 신학을 해체하는데... 그 집요함에 질려버리겠다. 통찰도 대단하고 읽는 중에 불편한 내용도 있다. 책 내용과 별 상관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는 단순한 스토리라인이다. 강우석이 만든 영화들처럼 분명한 선-악 구도가 있고, 권선징악으로 결말이 나야 사람들은 좋아한다. 복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관객들이 속이 시원해지면서 흥행이 된다. 흥행 스토리는 언제나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있다. 거기다 약방의 감초처럼 ‘이상한 놈’이 끼어 있어야 흥미를 돋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이 싸우는 동안 ‘비겁한 놈’과 ‘멍청한 놈’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무식하고 힘없는 놈’이 죽어난다. 이런 현실을 영화로 만들면 흥행은 물건너 간다.(예술 영화관에서 잠시 상영되다 내려지겠지...) 군중들은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한다. 지독히 현실적인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 받을려고 돈을 지불할 사람은 별로 없다. fiction에서 나마 권선징악을 보고 싶은 욕구일게다.
공공연한 비밀인 답답한 현실의 결과를 알려주마!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이 싸우면... 언제나 ‘더 나쁜 놈’이 이긴다.
이 보복이 악순환 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기 희생(희생양)’이다.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의 지옥같은 보복을 끝내기 위해 창조주이자 심판자인 하나님(예수)이 그 놈들 대신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요구한다. ‘나를 따르라. 니들도 나처럼 죽어라.’ 아~ 미치겠네...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욕망모방, 희생양 메카니즘, 집단폭력, 폭력의 교묘한 자기합리화인 신성화(성스러운 존재로 각색)..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본질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René Girard의 평생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이 방대한 내용을 하나의 서평에 다 담을 수는 없다. 오늘은 희생양 메카니즘에서 중요한 하나의 테마 '무차별화'만을 설명해보자.
      
“박해자들을 줄곧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차별화이다.”
 
뭔소리야.. 책은 쉽게 써야 한다. 번역된 글이라서 어렵게 느껴지는 거겠지? 좋다. 내 말로 풀어보자. 세상 사람들은 통상 ‘차이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박해받는다’고 설명한다. 지능의 차이, 재산의 차이, 건강의 차이, 인종의 차이, 신념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분들이 없는 놈들을 박해한다고 설명한다.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를 박해하는 것이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박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르네 지라르는 다수가 소수를 대상으로 행사하는 폭력과 박해가 차이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차이/차별이 박해의 원인이라는 논리가 교묘한 속임수란다. 진짜 원인은 무차별화, 즉 ‘차이가 없어질 때’ 박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재산도 더 많고, 지위도 높고, 힘도 더 세고, 훨씬더 우월한데 그렇다면 특별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과 동일하게 취급받을 때, 그 있는 분들이 열받아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 맞다. 놀라운 통찰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참 겸손하고 성품 좋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허례의식이나 권위의식이 없는 분이었다. 특별대우 받는 것을 싫어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섬기려고하는 분이었다. 보통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나면 그 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본인이 사용한 식판을 직접 들고가서 짬시키고 숟가락과 젓가락, 물컵을 따로 모으고 식당을 나간다. 그걸 지켜보던 외부인이나 내부 동료들은 그분이 직접 식판을 정리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저 정도 지위 높은 분이 참 겸손하시네...”라고 쳐다보며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매출액이 급격히 늘고, 회사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밥 먹고 나서 식판들고 일어나는 그분을 향해 “주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우째 직접 치우려고 하십니까.. 아랫사람들 시키시면되지...” 심지어는 주변 사람들한테 “뭐하는거야! 얼른 식판 받아드려. 직접 치우게 놔두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라며 핀잔주는 딸랑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분도 처음엔 “뭘 이런걸 딴 사람시키나... 내가 직접하면 되지..”라며 딸랑이들을 제재하셨다. 그런데 딸랑이들의 집요한 오지랖이 지속되자 그 분도 변했다. 지금은 당연히 밥먹고 나면 치우는건 ‘아랫 것들’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식사 마치자마자 바로 일어선다.(사실 직원들과 같이 밥먹는 오너 정도면 아주 양호한편이다. 특권의식에 심하게 사로잡힌 분들은 아래 것들과 겸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단지 식판치우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과 의사결정과정에 그리고 사고방식자체에 ‘섬기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군림하는 분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이제는 자신을 특별대접하지 않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분이 되었다. 딸랑이들이 왜 그 분을 특별대우하도록 분위기를 잡아갔을까? 그 딸랑이들 자신이 특별대우받고 싶은 것이다. 그 표현을 모시는 분을 떠받들므로 ‘니들도 나한테 그렇게 해줘’라며 분위기를 잡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서로 섬기려고 하는 곳에 임한다. 일방적으로 섬기고 섬김을 받는 것은 군림과 굴종의 관계이지 섬김의 관계가 아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그 꼴이 보기 싫었으면 직접 세숫대야를 들고 제자들 발을 씻겼겠는가? 서로를 배려하려하고 서로 섬기려고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나라는 이미 임했다. 세상을 군림하고 굴종하는 지옥으로 만들려는 인간들이 지겹다. 이 인간들은 윗사람 챙기는 것을 ‘예의’라고 우긴다. 묻고 싶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힘없고 돈없고 무식한 어르신들은 챙기지 않고 꼭 권력있고 지위높고, 학벌 좋고 돈 많은 사람들한테만 딸랑거리는가? 당신들이 그토록 외치는 예의가 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발휘되지 않는가? 오히려 약자를 더 배려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사람들은 차이로 인한 차별 때문에 박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대우가 없는 '차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남을 괴롭힌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라는 특권의식/특별대접에 젖어있는 사람들에 의해 상식과 원칙이 짓밟히고 있다. 반칙으로라도 이기기만 하면 끝이다. 그 반칙에 대해 문제재기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상식과 원칙이 이루어지는 사람사는 세상은 아직은 ‘꿈’이지만 그래도 그 꿈을 계속 꾸련다. 서로를 배려하고 모두를 귀히 여기는 하나님나라를 꿈꾼다.

2016년 7월 6일 수요일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최명,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이문열, 삼국지, 민음사
최명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젊어서 한번도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미래를 도모하지 말라. 그러나 늙어서 삼국지를 다시 탐독하는 사람과도 같이 하지 마라.” 이 말에는 젊어서 삼국지를 읽고 패기만만한 사람과 일을 같이 하되, 늙어서도 여전히 삼국지에 열을 올리는 사람은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 같이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표현일 것이다.

故 고우영선생 고우영선생이 술한잔 하고 이정문화백 집 벽지에다 그려준 관우

내가 삼국지를 처음 접한 것은 국민학교 댕길 때 동네 만화방에서다. 고우영 만화중에 서유기 5권을 제일 좋아했다. 만화방에서 10번은 넘게 본거 같다. 울매나 웃기던지... 고우영 선생 그림에 빠지면서 잡은 책이 ‘고우영 삼국지’다. 그렇게 삼국지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고우영선생이 그린 관우 그림은 박재동화백의 말처럼 ‘사람들이 부적으로 쓸 만큼’ 포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삼국지3

대학 다닐 때, 삼국지3 게임이 유행했다. 386컴퓨터에서 돌릴 수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게임이다. 방학 때 밤새면서 천하통일을 이루곤 아침에 뻣어버린 기억도 난다. 지금은 삼국지11까지 나왔다는데... 컴퓨터 게임 손 끊은지 오래다...ㅎㅎ
歷史와 小說, 正史와 野史 이걸 잘 구분해야 된다. 기득권에 의해 기록된 역사를 정사라고 한다. 반면 역사의 뒤에 숨은 野人들에 의해 은밀하게 기록되어 때로는 말로(口傳)되어 전해지는 역사를 야사라고 한다. 때로는 기록된 역사보다 뒤로 전해지는 얘기가 훨씬더 당시 역사를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놈이 장땡이다. 붓을 든 놈이 결국 권력이다. 삼국지가 그 예이다. 실제 역사에서 조조가 훨씬 더 백성들을 위하고 리더십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조조가 다스린 위나라 지역이 중원의 대부분이었다. 유비가 세운 촉나라는 제갈량의 천하삼분론에 맞게 최소한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가능한 지형적 특성을 가진 쓰촨분지에 들어선 별 볼 일 없는 나라다. 그럼에도 삼국지는 유비를 인덕이 있고 백성들을 위하는 인물로, 조조를 간웅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건 결국 한 고조 유방이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폐망한 한나라의 입장에서 유비가 유방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설명하며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조조를 나쁜 놈으로 몰고 유비를 후덕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기록된 자료를 근거로 유비를 영웅, 조조를 나쁜 놈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역사는 언제나 쓰는 놈 마음이다.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정당한 권력도 역적이 된다. 반면에 기록에 남기면 역적도 정당한 권력이 된다. 역사와 소설도 마찬가지다.(삼국지는 역사고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다) 일반인들은 역사자료를 별로 읽지 않는다. 대신 재밌게 극화된 역사소설은 많이 본다. 소설은 재미가 목적이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역사를 재밌게 만들자니 각색을 할 수 밖에 없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된다. 그러나 정사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없는 인물을 만들던 이야기를 지어내든 해야되는데, 요즘 역사소설은 시대배경만 정사에서 빌려오고 완전히 그 시대와는 별개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다보니 정사를 왜곡하는 역사소설과 드라마가 많이 등장한다. 문제는 일반인들이 이걸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황당한 경우는 역사를 말하는데 자기가 본 역사드라마와 소설을 언급하고 있다. 역사적 문제를 논하면서 근거를 물어보면 드라마와 소설을 얘기한다. 기록된 역사도 믿을 수 없는 판에 소설 갖고 얘기하면 할말이 없어진다. 물론 역사기록물보다 실제 역사를 훨씬 더 충실하게 복원해놓은 역사소설도 있다. 어쨌든 정사나 야사, 역사와 소설... 쓰는 사람이 자기 ‘의도’를 가지고 쓰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꿍꿍이를 간파해 내는 성숙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삼국지는 여러 판본이 있고, 한국에서 출간된 것만도 박종화,정비석,황석영,김홍신... 아주 많다. 그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이문열 삼국지’다. 그의 현재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탁월한 문필력은 인정한다. 나도 삼국지는 이문열 판으로 읽었다. 언젠가 민음사 사장님이 세금문제(?)로 오륜교회 고등부에 삼국지10권 전집을 100질인가 기부처리로 기증했다. 아이들한테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서울대 최명교수가 쓴 ‘소설이 아닌 삼국지’는 삼국시대를 분석한 논문집인데 같이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중국 쓰촨 청뚜에 가면 武侯寺(무후사)라는 제갈량 사당이 있다. 뒤에는 유비 릉도 있는데, 96년, 08년 두번 가보았다. 12년 동안 청뚜는 상전벽해로 변해있었다.
마침 중국 인민군들이 관광을 나와서 한컷 찍어봤다.

무후사 초입 유비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