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5일 수요일

李元燮 譯解, 唐詩, 현암사:1965

唐詩(당나라 때의 시)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다. 후세 사람들이 이백을 흔히 시에 관한한 神仙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詩仙이라하였다. 반면에 두보는 시에 관한한 聖人의 반열에 올라섰다하여 詩聖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仙보다는 聖이 더 큰 평가다) 이백의 시를 모차르트의 날아갈 듯한 현란한 선율에 비할 수 있다면, 두보의 시는 바흐의 처절하리만치 장엄한 음율에 비할 수 있다. (시를 쓸 때도 이백은 휘갈려쓰듯 단번에 파격적인 형식으로 썼고, 두보는 운율과 형식에 맞추어 심사숙고 끝에 쓴 시도 나중에 또다시 수정하면서 시를 완성했다고 한다) 멋모를 때는 이백의 시가 멋있어 보였다. 뭔가 세상을 초탈한.. 속세를 떠나 자연과 벗삼아 살아가는... 삶을 즐길 줄 아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두보의 시는 뭔가 지지리도 궁상맞고.. 골치아픈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시를 보는 나까지 기분이 찌뿌둥해져서 두보의 시는 왠지 싫었다. 그러나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백의 술한잔하고 주사로 쏟아내는 알팍한 청량음료같은 시보다는 두보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절절히 배어있는 시에서 진국같은 참맛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이백의 시와 두보의 시를 한편씩 읽어보자.(내 멋대로의 해석을 첨부합니다)

山中問答 - 李白 -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어찌 산에서 사느냐고 나한테 묻기에
대답 없이 빙긋이 웃었더니 마음에 절로 여유가 (생긴다)
복사꽃이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는데
(여기는) 속세(인간세상)가 아니라 별천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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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壕村에서 - 杜甫 -
暮投石壕村 有吏夜捉人 老翁踰墻走 老婦出門看
吏呼一何怒 婦啼一何苦 聽婦前致詞 三男 城戍
一男附書至 二男新戰死 存者且偸生 死者長已矣
室中更無人 惟有乳下孫 孫有母未去 出入無完裙
老 力雖衰 請從吏夜歸 急應河陽役 猶得備晨炊
夜久語聲絶 如聞泣幽咽 天明登前途 獨與老翁別

석호촌에 투숙하다가
밤에 벼슬아치가 (강제징집을 위해)사람 잡아가는 사건이 있었다(격었다).
늙은 영감은 담을 넘어 도주했고,
늙은 할멈이 문을 나가보니
벼슬아치가 어찌나 성질을 내며 지랄을 하는지,
할멈은 울면서 괴로워했다.
할멈이 말을 하는데...
"세 아들이 다 업성( 城) 전투에 나갔습니다.
한 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는뎁쇼.
두 애는 죽었뎁니다.
산 사람은 언제죽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살아있고,
죽은 놈이야 저 멀리... (인생 종친거죠...)
집에 남자는 없습니다.
젖먹이 손주놈 하나 달랑 있는데
그 애 에미는 아직 (부역에) 안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출입할래야 옷(치마)이 없어 못나갑니다.
늙은 할망구 비록 쇠하나 미약한 힘이나마 있으니
나리를 따라 가겠습니다.
급히 하양(河陽) 役事(나라에서 시키는 강제노동)하는데 가면
그래도 밥쯤이야 해내겠죠"
밤이 깊어서야 말소리가 끊어지고
(영감과 며느리가)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날이 밝아 길을 떠나기 전에
(할멈은 끌려가고 없어서)영감하고만 인사를 나누었다.

중국 시인 중에 한명 더 언급하라면 두보와 이백 이전에 '굴원'이라는 더 대단한 인물이 있다.

목회현장에서 절박한 인간실존의 모습을 보며, 이백같이 삶은 대하는 태도를 '사치'라며 정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쪼으고 있는 나자신을 발견한다. 내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다. 나는 처절한 삶과 더불어.. 별 것도 없는 평범한 가운데서도 운치를 즐길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나는 예수님이 환자와 귀신들린 자만 찾아 다닌 사역에만 미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한적한 길을 다니시면서 제자들과 두런두런 얘기도 나누시고, 벼이삭을 손으로 비벼 까서 드시기도 하면서 때로는 농담을 때로는 가르침을 때로는 노래를.. 때로는 시한수를 을플줄 아는 .. 여유를 누릴 줄 아는 분이라 생각한다. 나는 각박한 목회자가 되기는 싫다. 때로는 시한수 읊조릴 줄 아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싶다. 때로는 양들을 우리 몰아넣기 위해 몰아치는 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풀밭에 풀어놓고 나또한 나무그늘에 누워 하나님을 묵상하며 키키덕거리는 목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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