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5일 수요일

앤드류 싱클레어, '체 게바라', 한울림:1984

대학시절 월례행사처럼 한달에 한번 청계천 헌책방 뒤지는 것을 즐기던 때였다. 헌책방을 뒤지다 보면 당시 판금조치된 불온서적(?)을 간간히 만나는 기쁨도 있었다. 그 때 만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앤드류 싱클레어가 쓴 '체 게바라’이다. 저자 앤드류 싱클레어는 작가이자 교수였다. 캠브리지/런던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런던로리머출판사 편집장시절에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울림출판사에서 울림총서 시리즈로 서슬퍼렇던 전두환군사정권 시절인 1984년에 출판되었다. 물론 번역자는 익명으로 보호하는 차원에서 ‘편집부’로 되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
전체 122페이지인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한 인물과 책이 떠올랐다. 대학1학년 때 보았던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두레)에서 만난 모택동이 바로 그이다. 체 게바라와 모택동은 너무 많이 닮아있어서 사실 너무 놀랬다. 물론 이들의 끝은 너무나도 상이하다. 모택동은 권력의 정점에서 죽었고, 체 게바라는 또 다른 혁명사상의 전파를 꿈꾸며 나그네 신세로 볼리비아 혁명게릴라를 이끌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차이는 있다.


모택동은 권력을 누리다가, 게바라는 끝까지 혁명현장을 사수하다 생을 마감했다.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이다. 흔히 알려진 체(che)는 동지라는 의미의 호칭이다. 게바라의 인생은 그 자신이 독백처럼 남긴 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싸웠고,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당시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게바라는 학점 따는데 급급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하는 데’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의학공부를 하고 있는 그였지만, 젊은시절 게바라의 최대 관심사는 ‘남아메리카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비참한 생활’에 가 있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자전거로 아르헨티나를 횡단하고, 선원으로 카르비아 제도를 돌아다닌 뒤, 친구 그라나도스와 함께 남미전대륙을 도보여행했다. 트럭운전사로, 짐꾼으로, 의사로, 접시닦이로 일하면서 대륙을 남미전역을 온몸으로 훓고 다닌 것이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아마존 강변에 위치한 '산 하블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이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곳에서 게바라는 '인간의 유대감과 사랑의 최고 형태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 생명을 건 도보여행을 통해 게바라는 아메리카인들과 그들이 안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있는 세계관을 체득했다.
(나 또한 제대후 자전거로 전국을 돌면서, 그리고 지난달 4주동안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도저히 책으로는 알 수 없는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여행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든다. 고생하는 목회자들이여 억지로 시간내서라도 여행을 떠나자....)
그는 이후 볼리비아, 쿠바, 과테말라 등 남미전역을 돌아다니며 게릴라전술을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미제국주의)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남아메리카 인민들의 운명을 뒤바꾸는데 자신을 드린다. 그가 혁명가가 되는데 영향을 미친 사상적 배경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불평등을 의식하게 되면서 특권가문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을 느끼게 된 집안의 영향.
2. 지적이고 조숙하고 반항적이며 고집이 센 성격.
3. 남미대륙을 방랑하면서, 여러 부패정권들이 대중빈곤을 하늘 탓으로 돌리면서
파렴치한 착취를 공공연히 행하는 것을 보게 된 것.
4. 병의 궁극적인 원인이 사회적 불평등이기에 치료가 불가능한
수백만명의 병자를 치료하고자 하였을 때, 느낀 의사로서의 당혹감.
5. 군부의 반란으로 실패한 볼리비아 혁명, 제국주의의 간섭으로 실패한 과테말라 혁명,


자신의 태만으로 실패한 멕시코 혁명.

이런 여러 개인적 체험들이 천성적으로 과격한 한 젊은의사를 의식화된 혁명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에르네스토 게바라를 체 게바라로 바꾸어 놓은 4번째 영향이다. 현대 최고의 강해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도 의사출신이다. 그는 전문적인 신학교육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 설교를 하면서 신학공부를 독학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집을 읽다보면 왠만한 신학자들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로이드 존스목사의 설교를 읽다보면 행간에 그가 가진 인간,청중,양들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히 묻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를 치료하다가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치유는 복음으로 인한 영혼치유에서 일어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게바라의 인생흔적을 살펴보면 이와 비슷하다.

한 개인의 질병을 낫도록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결국 남미 민중들의 근본적인 한계를 치유하고자 혁명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바라의 글과 연설문을 읽다보면 열악한 남미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다.
쿠바혁명전선에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명콤비를 이룬다.


카스트로가 유토피아적인 Visionary였다면 게바라는 실용주의자였다. 카스트로가 연설문을 가다듬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구상하는 동안, 게바르는 조용히 카스트로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적인 초치들을 취하는 기획실무를 담당했다. 카스트로는 변호사출신이다. 그는 법률,항고,배심원으로서 민중을 위한 변론이나 변호를 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의사였다.

그에게는 진단과 치료,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문제가 되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보면, 마치 마오쩌뚱과 저우언라이를 보는 듯하다. 나는 게바라에게서 조직능력 (그는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점조직을 구축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소비에트라는 지방네트웍을 통해 혁명을 완수한다)과 식지않는 열정을 배웠다. 그의 조직은 복잡하지 않았다.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속히 의사결정을 하고 결정된 사항을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조직구조여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에 나타난 이와 비슷한 조직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던 집단이 2차대전 롬멜이 구축한 독일군 작전참모부이다. 왜 거대한 연합군이 독일전차부대에 그렇게도 무참하게 당했는지는...(잔전참모부에 관해서는 한홍목사의 '거인들의 발자국' 서문 참조 요망)

아무튼 중간지도자를 세우고 권한을 위임하여, 의사결정과정을 줄이지 못한 조직은 절대 살아 남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는 지도자양성소여야 한다.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필요를 채우며, 재량권을 가지고 뭔가를 추진해 나가는 공동체, 궁극적으로는 리더가 너무 잘 세워져서, 5-6년 뒤에 "우리에게 더 이상 목사님이 필요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이것이 제자훈련 목회를 하고 있는 나의 꿈이다. 또 나는 게바라에게서 한 사람의 실존적 문제에 몰입해서 문제의 부분에 집착하여 큰 흐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 마을, 국가, 남미전체의 구조적인 모순을 파악해내는 시각을 배웠다. 그는 도보여행을 통해 현장에서 배웠다.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게릴라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면서 역사를 고민했다. 죽음의 기로에서 받은 소작농들의 생명을 건 도움을 받으면서 인간의 사랑을 체득했다. 그는
현장전문가이다. 나 또한 목회에 있어서 현장전문가이기를 원한다. 신학의 꽃은 지 아무리 지랄해도 ‘목회’이다. 영혼과 씨름하는 현장, 새 생명이 탄생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최전선… 목회현장이 바로 나의 죽을 장소인 것이다.

게바라의 삶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다. 현장에서 떠나기를 싫어 했고 민중들과 같이 부대끼면서 생을 마감한 그에게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혁명적’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바라의 노동가치에 대한 경제사상은 마르크스적이라가 보다는 오히려 청교도적 윤리에 가깝다.

또 하나 내가 게바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게바라는 자기 비판의 명수였다. 게바라가 자기 잘못과 정부의 실책을 분석하여 비판한 글과 연설은 게바라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적들이나 쏟아낼 수 있는 정도의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나는 또한 목회연수가 더해갈수록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하지 못하는 못난 놈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다음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다 넘겨주고, 자신은 17명의 혁명전사들(이들은 쿠바군의 장성을 포함한 현장베테랑들이다. 나는 언제쯤 이런 동지들을 만날 수 있을까…?)과 함께 다시 볼리비아로 떠난다. 사실 내가 게바라에게 반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쿠바혁명을 성취한 후 '이곳이 좋사오니…’라고 하면서 거기서 권력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다시 배낭을 메고 목숨을 나눈 경험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도움의 현장으로 떠난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참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서도 이미 보장된 부와 권력을 훌훌 미련없이 손털고 일어나는데, 왜 예수를 위해 목숨 걸었다는 인간들은 그렇게 권력에 집착하는지…. 어..이씨….

나는 결코 이런 인간이 되어선 않된다. 게바라, 원효처럼 이 땅에서는 미련없는 삶을 살고, 죽어서 주님한테 가서 보상해 달라고 우겨야쥐.. 이 땅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다가는 말년이 지저분해진다. 우리에게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헌신과 섬김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반대급부는 죽어서 하나님한테 가서 받자! 이게 성경적이다!

그는 혁명사상을 온 남미에 전파하여 남미 전부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이미 200년 전에 볼리바르가 이를 꿈꾸었던 바 있다) 이를 위해 볼리비아로 날아간 것이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비극적 패배의 원인은 너무나 뻔하게도 외부의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배반에 의해서이다.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 게릴라 동지 몇 명의 배반이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는 전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게바라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다. 그래서 적들을 처단하는 것처럼, 내부에 있는 배반자들을 엄하게 처단하지 않았다. 이것이 결국 게바라의 족쇄가 된 것이다. 역사의 비극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된다. 기분이 더럽다.

내가 게바라의 전체 삶에서 배운 마지막은 교훈은 '
언행일치’에 있다. 그는 처절하게 고민했고, 대안을 모색했으며, 그것을 신중하게 입밖으로 내뱉았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데로 민중들을 설득한대로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다. 나도 설교만 번드르하게 잘 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삶의 본이 되는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게바라를 보면서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 실천문학사에서 2000년 봄에 출간한 장 크로미에의 '체게바라 평전’은 좀 너무한 것 같다. 내용은 둘째치고 게바라라는 인물과 양장본의 12,000원 짜리 책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읽은 한울림에서 출간한 클레어가 쓴 책은 1,800짜리에 누렇게 뜬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좋다. 누가 번역했는진 알 수 없지만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번역자는 독일어판을 번역본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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