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런 스콧,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를 향한 제자도, 두란노:1997
<Summary:요약>
먼저 책 내용을 요약해보자....
대부분의 선교관련 서적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서문에서는 이 책을 쓰게된 저자의 동기를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주제를 삼각관계로 제시하고 그 역동적 상호관계를 밝히고자하는 시도로 이 책을 쓴다고 했다. 저자가 말하는 세 가지 주제는 제자도, 정의, 선교이다. 1장에서는 사도시대 이후 복음이 괄목할만한 확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은 아직 그 과제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시대부터 현재까지 전도활동이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그 제약을 육제적(신분적), 재정적, 문화적(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 영적인 부분(사탄의 반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조용히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극복해가며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은 양과 질의 면에서 괄목할 만하며 영혼구원에 뿐만 아니라 계몽, 교육, 사회정의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또 이루어저야 만 한다. 2장에서는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서구 개신교 200년 선교활동을 제국주의적 선교의 '과실'과 개화의 '공로'의 공과로 설명하는 J.Herbert Kane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저자는 선교의 실제적 장애물에는 세계적인 Inflation, 위화감을 조성하는 기독교인의 생활양식, 자민족 중심적인 문화이해로 유발된 신학의 억지적용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선교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또 수직/수평적 이분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전략들의 개발로 낙관적이라고 말한다. 서문과 1,2장이 본서의 서론이었다면, 3장∼6장은 선교의 성서적 기초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3,4장은 구약에 나타난 선교를, 5,장은 신약에 나타난 선교를 살펴보고 있다. 그 후 7장에서는 '고통 당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전세계적 관점에서 본 선교를 말하면서 전세계적 불의와 부의 편중, 빈곤의 원인, 다국적기업의 패해를 지적하고 있다. 이어 8장에서는 개인적인 악과 이런 악의 총체인 구조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성경에서 찾고 있다. 또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더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선교는 정의의 구현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9장에서는 대위임령의 실체는 '제자삼는 일'에 있다고 보고, 성경적인 제자도의 표준을 순종,사랑,열매맺음이라고 파악한다. 10장에서는 이런 제자삼는 일은 결국 재생산을 가져와 기하급수적 교회성장을 초래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11장에서는 이런 복음전도의 참된 목적인 제자도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이어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까지 주장한다. 또 제자삼기를 겨냥하는 복음의 초청은 살아 계신 주님과 연합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는 요청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복음을 받은 자는 사회적인 명령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 제자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12장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제자도, 사회정의, 선교를 주제로, LeRoy Eims의 '성장하는 제자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제자도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 삶의 실제적 변화와 이웃을 향한 적극적 행동까지 나아가는 개념으로 제자도를 설명한다. 또 12장에서는 선교를 위한 실제적 준비를 Arthur Glasser의 개념을 빌어 영적인 성숙, 공동체의 경험, (영적)은사의 발견, 문화적 인식(타문화권에 대한 준비)의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타문화에 대한 인식을 위해 실제적 타문화 체험의 필요서을 강조하면서 여러 프로그램(EFICOR,HNGR)를 실례로 들고 있다. 마지막 13장에서는 말씀을 행하기 위한 세가지 행동유형을 개인적,공동체적,국가적/국제적 활동으로 나누어 각각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 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과정을 성경공부를 통해 확신을 가지고 헌신을 결의하며 원주민과 자신을 동일시함을 통해 실제적 참여를 한다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세계 기아문제에 대한 교회공동체와 국가적 차원의 대응방법을 단계적으로 모색함으로 그 실제적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있다. 결론부분에서는 선교를 한답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 하면서 항상 우리 자신을 살펴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Evaluation:평가>
우선 저자의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동기형성과정을 한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저자의 성장 배경을 살펴봄으로 저자가 왜 선교에 있어서 제자도와 사회정의실현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Wardron Scott은 Navigators선교회 출신이다. 이 선교단체는 '제자도 훈련'에 대한 강조, 새신자들을 기술적으로 양육하는데 대한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립자 도슨 트로트먼이 주장한 세계선교를 향한 'World Vision'으로 유명한 국제선교단체이다. 저자는 Navigators선교회에서 신앙이 성장하면서 수직적 차원에서의 선교를 상당히 강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이런 관점을 가지고 20년 동안 세계 여러 사역지를 다니면서 선교사역을 감당 하게되었다. 그러던 중 WEF(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제 6차 연합총회에 Navigators선교회 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1975년 1월부터 WEF총재직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저자는 수년동안 여러 복음주의 단체와 연합사역을 하면서 한 지역에 국한된 시각이 아닌 그야말로 선교를 세계적 시각으로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특히 서구와 제3세계, 양쪽에서 복음주의 공동체들과 교류하면서 Navigators선교회 출신의 저자가 가진 선교적 관점이 심각하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한 복음과 구원에 관한 내세신앙을 전달해주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것이 선교사역의 전부인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WEF총재가 되어서 여러 다른 선교단체의 사역들을 조율해야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각 선교단체가 추구하는 선교사역 방법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고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제3세계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 원주민들과 서구 선교사들간의 사고의 gap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또 선교현지의 필요를 바라보면서, 선교현장에서 종국적인 선교의 완성은 도대체 어떤 형태인가를 고민하면서 Church planting이 선교의 완성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까지가 선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먼저 깨닫은 저자는 수직적 차원만 강조하는 Navigators의 한계를 스스로 폭넓은 조망(perspective)을 통해 극복한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최종적으로 다시 언급하기를 선교현장에서 사회정의구현도 필요하지만 선교의 본질상 복음전파와 영혼구원,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추구, 교회개척 등이 사회정의에 우선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는 제자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회정의실현까지 선교의 영역에 포함한 것은 일단 선교현장의 실제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선교를 단순한 복음전도로만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인 公義에 부합하도록 인간사회가 정의로와 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교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저자는 이런 사회정의의 실현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文化優越主義에 빠져 自文化中心的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원주민들의 의견을 도외시한 채 선교사역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 시각적 교정을 출발하고자 한다. 이는 이 때까지 역사상 항상 문명의 우월성을 구가해왔던 서구사람들의 교만한 사고가 여실히 드러난 일면이라 하겠다. 서양사람들은 항상 가르치려고 하는 입장이었기에 배우려고 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선교사도 이에 예외는 아니다. 선교사들조차 선교지의 주민들을 미개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원주민 회심자들을 나중에 함께 일할 동역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끝까지 관리 감독을 해야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서구 선교사들의 교만은 결국 피선교지의 주민들이 스스로 교회를 운영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저자가 선교현지의 경험을 통해 서구선교사들의 문화우월적 시각이 비성경적이라는 지적은 상당히 예리하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지적은 많았으나, 저자의 지적은 현지경험을 통해서 세계 각지를 발로 뛰면서 얻은 결론이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 중 7장을 살펴보다보면 너무 한쪽 시각만을 고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7장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본 선교:고통당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에서 제3세계와 서구 선진국의 부를 비교하면서 부가 서구제국으로 너무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가난한 자의 편을 들고 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권력과 돈, 성에 억눌린 사람들 즉 부당하게 피해보는 약자편에 서셨다는 것이지, 단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 편에 서신 것이 아니다. 저자의 이런 관점은 다분히 이원론적이며, 천편일률적인 흑백논리요, 중용이 없는 이분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실존에서는 부요하지만 선하고 정의로운 자와, 가난하지만 악한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가난한 자가 항상 모든 부한자들에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것 만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物神主義(Mammonisim)에 빠진 부요한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富의 遍在현상인 貧益貧 富益富현상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난한 자들이 심령이 가난하여 주님을 의뢰하며, 부요한 자들은 마음이 강팍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요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자의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이라는 단순히 일방적인 이분적 도식은 조금 위험하다 하겠다.
<Application:응용>
2장에서 저자는 이 때까지 선교선교에 있어서 자문화중심적 문화제국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경계하고 있다. 선교 2세대 국가인 한국은 서구 선교사들의 잘못된 자문화중심적 문화제국주의적 태도의 폐해를 실제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自傳,自給,自治의 뇌비우스 선교정책이라는 놀라운 유산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나쁜 인습과 좋은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우월주의에 빠져 기독교를 전하기보다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기독교를 서구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피선교지 주민들에게 서구문화를 기독교인 양 전달한 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불과 100여년 전에 처했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입장을 바꾸어 놓고 피선교인의 입장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방법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상황화를 빌미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9,10,11장의 제자도에 대한 내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의 선교개념은 개인적 제자도로 출발해 개인의 제자도가 공적인 제자도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하면 결국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하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세계선교가 완성될 것이라는 개념이다. 제자도는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일 뿐만 아니라, 세상속의 제자도이다. 저자의 확장된 제자도 개념을 받아들여 제자훈련을 시킬 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구조적인 악으로 똘똘 뭉혀진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세상은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항상 위협을 받게 돼있다. 우리는 내세만을 강조하면서 사회와 국가를 도외시하는 속좁은 제자도를 버리고 진취적인 성경적 제자도를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12장 '제자도, 사회정의 그리고 선교:새로운 세계를 향하여'에서 저자가 주장한 구체적인 선교를 위한 준비에서 타문화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위해 실제적 참여의 예로 EFICOR이나 HNGR의 형태를 제안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사실 선교헌신자들이 너무 준비없이 선교현장에 투입된 것이 사실이다. 선교학과 문화인류학 등등의 학문적 연구와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학문만을 선교준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측면과 장기사역을 하지 전에 사역지를 단기(적어도 2-3년)로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과정동안은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역지 분위기 파악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타문화를 인식함으로 장기사역시 문화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단기적인 현장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현장중심주의는 엎어놓고 무조건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준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다만 선교사로서의 준비가 너무 일반적이고 이론적이고 학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현장중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Integration:책 읽으면서 든 생각>
1.개인복음과 사회복음의 상호보완적 공존
교회사를 볼 때 하나님 나라 확장을 빌미로 항상 방법론이 문제였다. 하나님의 공의 따라 정의를 실천하자는 행동파가 있었던 반면,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소심파가 있었다. 문제는 행동파는 소심파의 자아몰입적 신앙을 개인적이자 이기적 신앙으로 치부하면서 비판하였고, 소심파는 행동파를 복음의 역할인 영혼구원을 간과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7,80년대 상황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장로회를 위시한 여러 교단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사회정의를 실천한다는 명분하에 목사와 성도들이 거리로 뛰어 나갔다. 반정부 투쟁을 하고 물리력에 의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정의 실현에 치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영혼구원과 전도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이다. 이에 반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단들은 항상 현실안주,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상유지를 원했다.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면 조찬기도회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사회야 어찌되든 말든 예수 믿고 천당가자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무리들을 그들의 명분이나 목적보다는 방법의 그릇됨을 부각시키며 잘못된 형태의 신앙 소유자들로 매도하였다. 이런 소인배적 신앙으로는 역대하 7장 14절의 하나님, 즉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회의 불의와 악을 목숨걸고 비판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또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이런 속좁은 신앙은 복음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사전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두가지 시각은 공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실련을 설립하고 복음주의의 사회정의실현에 압장섰던 서경석 목사님이 경실련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목회사역으로 돌아가면서 한 그의 고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운동(Movement)로 바뀌지 않더군요. 개인적 회심없이는 하나님의 공의 실현은 요원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또 소심했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80년대와 90년대의 기독교의 사회참여의 긍정적 영향을 재평가하며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얼마나 바람직한 현상인지 모르겠다. 복음은 개인회심에 근거한 제자도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으로 까지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세계선교를 추구한다.
2.복음과 빵이 같이 들어가야 한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선교는 빵과 복음이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의 초기 형태는 대체로 의료선교나, 교육사업, 산업화 기술전달, 기아문제 해결 등등의 사회사업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전도를 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선교를 한답시고, 복음제시를통한 영혼구원은 접어 둔 채로, 얼마나 많은 선교단체들이 선교사업에서 선교는 없고, 사업만 남아 직접적인 영혼구원 없는 일로 바빠하는가? 물론 선교지 원주민들과의 contact point를 만드는 측면에서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공장도 세우고 그들의 육체적 물질적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준다는 명목하에 일에만 치이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96년 중국 내륙(四川, 雲南省)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해 보면, 선교현장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것 못지 않게 사회사업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와 식료품이 모자라서 기아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복음은 배부른 자들의 지적 유희로 치부되고 있었다. 물론 그들중에도 복음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원주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생명유지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자체가 힘든 그들에게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없이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너무 도외시한 의욕이 아닐까? 또 기본적 의료해택을 받지 못해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도 의료행위과 복음제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문맹율이 높아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자도를 가르치기는커녕 초보적인 성경공부를 배우기도 힘든 그들에게 복음전파와 함께 교육사업을 실시하여 글을 깨우쳐주며 양육을 하는 것이 휠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교육사업은 단기적으로는 제자로 양육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수준을 높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또 의료선교는 그들의 육신적 필요를 채워줌과 동시에 영적인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기에 아주 용이하다. 대부분의 경우 육신에 질병을 가진 자들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농촌개량사업이라든지 그들의 생계 해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함으로 희망이 없는 그들에게 삶에 대한 소망을 심어줄 수 있다. 그들은 내세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현세에 대한 희망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복음은 그들의 육신적,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면서 동시에 전파되는 것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성경적인 것 같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러했기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병 고쳐주고, 헐벗은 자를 먹이고, 귀신 쫓아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지탄받는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주는데 사용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전파없는 선교사업도 문제지만 사업없는 복음제시는 그들에게 공허한 메아리로 다가갈 뿐이다. 그러므로 빵과 복음은 동시에 들어가야 한다. 노파심에서 다시 언급한다. 이 둘이 동시에 들어가야 하지만, 빵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정(process)임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단도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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