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9일 일요일

다카시나 슈지, 「예술과 패트런-명화로 읽는 미술 후원의 역사」, 눌와

高階秀爾(다카시나 슈지), 「예술과 패트런-명화로 읽는 미술 후원의 역사」

예술 작품을 그리고/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 뒤에는 예술가들이 그리고/만들도록 요청하고 주문하고 비평하고 후원하고, 돈 대주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Patron이라 부른다. 패트런을 이해하고, 패트런과 예술가들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작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은 시대별로 패트런 시스템 운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15세기 르네상스 전성기가 피렌체에서 꽃 핀 것은 메디치가문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뒤를 봐주며 돈을 대고 후원한 것은 메디치 가문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문들도 있고, 특히 동업자 조합(직물조합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서명의 방’ 벽화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그린 것이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제작 의뢰와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프랑수아 1세가 당시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받아들여 수많은 작품들을 매입하고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후원한 사실은 유명하다.
루벤스는 스페인 필리페 4세에게 , 또 영국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고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은 화가라기 보다는 직업 외교관 내지는 귀족 기사처럼 보인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에 대한 대항으로 가톨릭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통해 가톨릭 자체 내에서 개혁을 추진한다. 이를 반동종교개혁이라고 하는데 이 회의에서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화나 조각 등 예술 표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우리는 구원의 신비한 이야기를 회화나 그 밖의 수단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중이 신앙의 조항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마음에 간직하도록 교화 육성할 것”이라는 결정은 바로크 미술 발전을 재촉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엄격한 금욕적 태도 때문에 회화나 조각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가톨릭 성당이 더 호화롭고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바로크 예술은 교회의 보호 아래 발전했다. pp.88-90.

17세기 말 소수의 부유한 시민(예를 들면 은행가로 카라바조를 열렬히 후원하고 지지한 빈첸초 주스티니아니 등)도 있다. 하지만 로마의 오랜 명문가가 몰락해 가던 이 시기에 나타난 유력한 패트런은 교황청과 관계 된 고위 성직자였다. 니콜라 푸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 때문이다. p.98.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로테스탄트가 대세였다. 스페인처럼 엄격한 이단 심문도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나 종교전쟁도 없었다. 정치 종교적 관용이 넘쳐나는 분위기의 네덜란드에서 경제가 발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유럽 다른 나라들 보다 훨씬 일찍 이 시기 네덜란드에는 전문 화상이 생겨났다. 베르메르의 아버지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성 루가 조합에 등록된 ‘미술상’이었다. 매형도 고급 액자상으로 유명한 화상이었다. 베르메르 자신도 화상으로 활동했다. 조합 뿐 아니라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시민단체도 패트런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집단초상화’ 장르가 나타난다. 이 집단초상화는 오늘날의 단체 기념사진과 같은데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이 의뢰한 집단초상화다. 또 렘브란트의 명작 ‘야경’은 암스테르담 시민대(화승총조합)이 주문한 집단초상화다. pp.103-111.

돈 있는 귀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예술 작품 감상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미술관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은 ‘프랑스 혁명’의 결과다.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한 것은 혁명정부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미술품 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전쟁으로 정복한 외국 각지에서 조직적으로 회화나 조각을 파리로 가져와 미술관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미술관이 등장하고 전람회 제도가 확립되자 미술작품을 향수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음악 세계에서 예전에는 모차르트가 그러했듯이 주로 교회나 왕후귀족의 살롱이 연주의 주요 무대였다면, 콘서트홀 내지는 극장에서 많은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를 하는 오늘날과 같은 형식이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감상 형식의 변화가 지니는 의미는 두가지다. 첫째, 예술 작품이 장식이나 권위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술’로서 즉 미적 목적을 위해 감상된다는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둘째, 한정된 특정 감상자층으로부터 열린 불특정 감상자층으로의 확대를 가져왔다.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한 석판화의 등장은 미술애호가의 수를 급증시켰다. pp.129-134.

프랑스혁명 이전 17세기 태양왕 시대에 설립된 회화조각 아카데미 전람회는 예술가등이 유명세를 타며 등장하는 등용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예술가들의 유일한 공식발표 기관이었던 아카데미의 전람회가 점차 경직되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혁명 이후 여러 형태의 개인전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1864년 살롱의 심사는 어느 해보다 엄격해서 낙선된 화가들 사이에 불만이 높았다. 그 소리가 귀에 들어갔던지 나폴레옹 3세는 살롱 개막 직전에 회장을 찾아와 낙선 작품으로 살펴본 후, 살롱과는 달리 낙선 작품만을 모은 전람회를 열라고 명령했다. 이 낙선전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고 떨어진 그 유명한 ‘풀밭 위의 식사’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마네의 명작이 전시되었다. 결국 예술원이 창설되면서 예전의 살롱에서는 아카데미 회원이라야만 출품이 가능했던 제도가 폐지되고, 19세기 살롱에서는 ‘자유/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실제로 외국인을 포함해서 누구한테나 문호가 개방된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은 파리로 몰려들게 된다. 이런 배경이 파리가 국제적인 예술 도시가 되는데 큰 요인이 되었다. pp.130-172.

예술작품 관객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출품자 수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경험이 얕은 관객은 수많은 작품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편 예술가들도 직접 주문을 받는 일이 적어졌고, 따라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거기에서, 관객에게는 작품의 의미나 질이 좋고 나쁜지를 가르치고 예술가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충고하는 중개자로서 미술비평가가 등장하게 된다. 당시 문인이면서 미술비평을 활약했던 인물로는 스탕달, 보들레르, 테오필고티에, 졸라 등이 있다. 본인이 화가이면서 미술비평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들라크루아다. 들라크루아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푸생 같은 대가부터 피에로 폴 프뤼동, 제리코, 코로 등 동시대 선배 화가들까지 논한 작가론을 발표했다. 괴테도 당시 유명한 미술비평가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필렌’이라는 잡지를 통해 회화 콩쿠르를 기획하기도 했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출품했을 때 신문비평은 ‘뻔뻔스럽고 너절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에밀 졸라는 마네를 옹호하는 평론을 써서 ‘풀밭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는 장래에 루부르 미술관에 소장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적으로 큰 권위를 지니고 있던 아카데미파에 대항하여 등장한 혁신적인 전위파와의 대립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예술 운동의 옹호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활동한 최초의 화상은 뒤랑 뤼엘이다. 뒤랑 뤼엘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1874년 ‘인상파전’이 재정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랑 뤼엘은 계속 인상파들을 원조했고 2년 후에 열린 제2회전 때는 자신의 화랑을 전시장으로 제공하고 1882년 제7회전 때도 전시장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자신의 화랑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개인전을 개회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 인상파, 후기 인상파, 나비파, 포비슴, 큐비즘 등 근대 미술사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예술 운동에 끊임없이 눈을 돌리고 재빨리 뛰어난 재능을 찾아냈던 사람이 바로 앙브루아즈 볼라르다. 볼라르는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 고흐가 죽은 후 최초의 회고전을 했으며, 1901년 피카소의 첫 개인전, 1904년에는 앙리 마티스의 첫 개인전을 조직했다. 앙리 루소의 작품을 처음으로 산 것도 그였다.
2차대전 후 미술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페기 구겐하임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정부가 예술작품을 발주하면서 관공서가 패트런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 문화부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 20세기 예술 기념물을 남기기 위해 마르크 샤갈에게 천장화 제작을 맡겼다. 모차르트의 ‘요술피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에 이르는 열네 작곡가의 작품을 주제로 한 샤갈의 천장화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명물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거물급 컬렉터는 재벌들이다. J,P.모건, 록펠러, 밴더빌트.... 삼성...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참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콩쿠르/전람회 개최하고
1.전시 특권 제공/ 도록제작/ 판매 대행/ 미리 구매
2.상금 수여
3.적어도 1년 이상 작업공간 무료 제공
등등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거 밀어주는 錢主들이 별로 없을까? 돈 벌어서 투자와 재산 은닉 목적으로만 예술작품 구매하지 말고,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고자 하는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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