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시인을 뽑아보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내 개인적으로는 송강 정철도 아니고 매월당 김시습도 아니다. 조선 후기 삿갓하나 쓰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걸레처럼 여기며 자신의 온 몸으로 팔도를 쓸고 닦고 다니던 방랑시인 김병연을 추천하고 싶다. 흔히 김삿갓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병연은 집안이 몰락해버려서 집안 하인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병연은 과거에 응시했는데 '김익순의 죄를 신랄하게 맹박'하여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병연이 과거에서 그렇게 씹어돌렸던 김익순은 누구냐구? 김익순은 순조 때 서북지방 선천에서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김익순은 술에 취해 누워있다가 홍경래의 군사들이 몰려들어와 순식간에 선천지역이 홍경래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직무유기에다 모반대역죄로 사형을 당하였고, 그의 일가는 폐족(廢族)을 당하였다. 그런데 병연이 장원급제하기 위해 그렇게 씹어댄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사실은 병연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김익순 사건으로 폐족을 당한 김병연의 부친 김안근은 자식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5살 병연을 하인의 손에 맡겨서 피신시킨 것이었다. 장원급제한 나중에 집안 내력을 알게된 김병연은 급제를 위해 할아버지를 욕한 자신과 그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며 22살 때 집을 나가 팔도들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는 양반의 신분을 드러내는 갓을 쓰지 않고, 항상 삿갓을 쓰고 다녔다. 연유인즉 비와 햇볕을 막기에는 비싼 갓보다 갈대나 대나무로 만든 싼 삿갓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실은 하늘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사람들은 그를 김립(金笠),김삿갓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먼저 김병연의 시 한편을 살펴보자.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는 그냥 한문독해를 해서는 읽을 수도 없는 시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김병연이 음가(발음)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본 시에서 김병연이 사용한 숫자는 전부 한글로 읽어야 한다.
二十:스무 → 스무나무: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
三十:서른 → 섧은 → 서러운
四十:마흔 → 망할
五十:쉰 → 상한
七十:일흔 → 이런
三十:서른 → 선(설익은)
이런 Code를 알고 독해를 해보자면 시의 내용은 이렇게 해석된다.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 놈의 집에서 쉰밥을 주는구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손가
내 집에 돌아가 선 밥 먹은만 못하네
언제부터인가 동음이의(同音異義)나 발음이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말장난을 치는 것이 최고의 개그가 되었다. 남희석이 시작해서 요즘 개그콘서트에 박준형이 우비삼남매에서 말장난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위의 시를 보면, 조선 최고의 말장난 일인자는 단연 김병연이 아닌가 싶다. 시를 이정도의 말장난으로 쓸 정도라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병연의 詩중 대부분은 시정잡배들이 격는 일상의 내용을 漢詩로 지은 것이다. 그의 초기 시는 세상에 대한 탄식과 한탄의 내용이 많다. 그러나 57해로 인생을 마감하기 전, 인생말기의 시는 세상을 따듯하게 그리는 시들도 몇편 보인다.
나를 정말 놀라 자빠지게 만든 김병연의 시 한편을 더 소개한다.
天長去無執 花老葉不來
菊樹寒沙發 枝影半從地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月移山影改 通市求利來
위 한시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은 높아서 가도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이 시드니 나비 날아들지 않도다
국화꽃은 찬 모래밭에 피고
나뭇가지 땅을 향해 반쯤 늘어졌도다
강가의 정자를 가난한 선비가 지나다가
크게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어졌구나
달 기울어 산 그림자도 달라지니
시장을 누비며 돈 벌어 오도다 .
그런데 위 한시를 소리나는대로 읽어보라.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천장거무집 화로엽불래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월이산영개 통시구이래
독음(讀音)한 내용을 풀어보면 이런 뜻이 된다.
천장에는 거미집이 끼고, 화로에는 곁불 냄새 나네
국수는 한 사발인데, 지렁(간장)은 반종지일세
강정과 사과를 빌려와, 대추 복숭아 아래 놓네
워리~ 사냥개는 통시 구린내만 풍기네
놀랍지 않은가? 뜻과 발음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시를 한편에 담아놓은 것이다.
처음 이 시를 읽다가 하도 놀라서 한동안 멍~해 있었다.
정말 놀라자빠지는 줄 알았다. 말장난도 이 정도 수준이면 거의 神의 경지에 다다랐다 할 만하다.
아무튼 내가 꼽는 조선 최고의 시인 김병연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김병연 시집은 여러권 나와있는데, 범우사에서 나온 책이 가장 싸다. 번역도 괜찮다. 또 김병연의 생애를 기록해놓은 책도 여러권 있지만 이문열의 소설 '시인'을 추천하고 싶다. 이문열의 극우적 사상은 별로지만 그가 대단한 문필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문열의 '시인'은 소설형식으로 재편집한 김병연전기인데... 감동과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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