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박원순, 내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겨레신문사

주류 기득권세력 입장 볼 때, 언제나 삐딱하게 대들면서 자신의 패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찔러대는 비주류는 일소해야할 죽여 마땅한 눈에 가시같은 존재들이다. 끊임없이 특이한 발상과 비유로 주류 제도권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하는 논리들로 무장한 체 도덕적 청렴성까지 겸비한 인물이 대들 때면 주류들은 이 비주류 인물을 죽이지 못해 안달난다. 결국 주류 기득권은 비주류 삐딱이를 법이라는 합법적(?) 살인도구로 처형한다. 이름하야 ‘사법살인’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주류는 언제나 패거리를 지어 Teamwork을 이루는 반면에 비주류는 언제나 독고다이다. 그러다보니 '쪽수'라는 힘의 논리에 의해 죽어간 고결한 비주류가 역사에는 너무 많다. 박원순 변호사는 법 전공자 답게 역사 속에서 독고다이로 죽어간 비주류의 흔적을 찾아 10명의 삶을 추적한다.
1.그리스 기득권 주류세력 소피스트들의 무식함을 ‘니 자신이 뭘 모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라’고 만천하에 논리로 다 까벌여 결국 주류 기득권에 의해 택도 아닌 죄목으로 소송당해 법에 의해 죽어간 소크라테스
2.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대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기득권에 둘러쌓여 그들의 회칠한 무덤같은 패부를 들춰내다 정당하지도 못한 철차와 로마 공권력의 묵인을 통해 십자가 처형당한 예수
3.영국에 빌붙어 프랑스를 팔아먹고선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부르고뉴파와 정치권력에 빌붙은 교회권력자들에 의해 말도 안되는 사법처리를 받고 화형당한 순전한 잔 다르크
4.헨리8세과 그 권력 앞에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린 기생충들 앞에서 반대의사는 표시 못하고 ‘침묵’함으로 양심을 표현하고자한 토마스 모어... 결국 이 탁월한 법률가/신학자/행정가를 주류 기득권세력은 런던탑에서 목잘라 처형했다.
5.타락한 중세교회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난의 화살을 돌릴 대상을 찾아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페이스에 말려들어 교회를 욕할 생각은 못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마녀’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어거지 항목으로 잡아들여진 여성들이 말도 안되는 죄목으로 화형당했다.
6.망원경을 발명해서 지구의 자전과 태양 중심의 공전이라는 천체물리의 진실 알게된 갈릴레이 갈릴레오... 이 비주류를 향해 주류는 법으로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는 판결을 결국 받아낸다.
7. 1차대전의 패전 원인을 너무나 많이 품고 있던 프랑스 주류 기득권세력에게 패인을 떠넘기기 위해 희생양으로 유대인 드레퓌스는 너무나 적합하고 만만한 인물이었다. 여론조차 프랑스의 자존심을 위해 드레퓌스가 군사 정보를 독일군에 넘겨서 전쟁에서 졌다고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드레퓌스 사건은 에밀 졸라 같은 프랑스의 위대한 양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덤볐기에 사필귀정으로 바로 잡혔다. 기득권의 비주류 죽이기 사건의 전형이다.
8.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들어선 독일 괴뢰정부 Vichy정권의 권력자 페탱장군, 그 재판과정은 권력과 이권 앞에 인간들이 얼마나 지저분해 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도 프랑스는 독일 패전 후, 철저한 과거청산작업을 통해 비시정부 관련 인사들을 솎아내서 역사를 바로잡았다. 반면에 우리는 일제청산.. 아직 말도 못꺼낸다. 아직도 대한민국의 주류는 그 친일파들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하는데 가만 있을 후손들이 있겠는가. 이 효에 충실한 인간들 때문에 한국역사는 질곡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9. 미국 원자폭탄 제작과정에서 중요기밀을 소련에 넘겼다는 간첩죄로 기소된 로젠버그 부부, 음해였지만 미국 정부와 FBI는 로젠버그 집안의 내부 갈등을 이용해 서로 고발하고 위증하게 해서 멀쩡한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반공산주의의 시대 분위기가 결국 이 부부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시 살아있는 양심들의 활동은 눈부시다.
10. 고상한 척하는 문학 주류사회가 D.H.Lawrence의 ‘차탈레 부인의 사랑’을 외설로 몰아가는 과정은... 또 그 재판과정은 위의 7가지 사례들과 똑같이 진행된다. 주류 문학의 비주류문학 죽이기!
박원순 변호사는 위 10가지 사건을 ‘세기의 재판이야기’라는 부제로 차분히 설명한다.
주류 기득권의 비주류 죽이기...
이게 이 책의 진짜 주제라 할만하다.
왜 이 책을 보는데, 노무현이 자꾸 떠오를까... 희얀하네..ㅎ

박홍규, 예술 정치를 만나다, 이다미디어

음악,미술,조각,문학,영화.. 모든 예술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각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다. ‘순수’예술이란 용어는 사실상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저마다 작가의 의도와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기서 이 ‘의도’를 읽어내다보면 예술 이란 것이 참... 여러 각도로 재미있게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술가의 숨은 의도와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잠재 의도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으로 해석하지 말자) 동물이다. 사람 둘이 모이면 정치가 나타난다. 예술가도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라 자기 의도를 드러낸다. 그 의도가 바로 ‘정치적’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 작품은 정치적이다.
영남대 법대 박홍규교수는 세상과 시대에 관심이 많은 법학자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분야를 찝쩍대고 다닌다. 문학, 미술, 영화... 그의 세상 읽기는 법조문 해석과 동일한 작업이다. 그의 예술 작품 감상은 법연구의 연장이다.
경북 출신으로 영남대 법학과를 나와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존 법학자들처럼 철저히 제도권 교육에 의해 틀지워진 인물이 아니라서 인지, 대학의 주류사회(서울 1류대학)에서 벗어나 공부한 편력 때문인지 사고가 굉장히 열려있다.
“법학 교수가 다른 분야에 이렇게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딴 짓 무지하게 하면서 교수 월급 받아먹어도 되나?” 싶지만, 나는 박홍규교수를 변호하고 싶다. 그의 이런 지적 자유가 더 가지를 뻣어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지식인으로 남아주기 바란다. 모든 것이 전문화 되어 자기 분야 밖에 모르는 꼴통의 시대 흐름을 제발 좀 깨주는 모델이 되어주길 바라는 심정에서다. 딱히 ‘통섭’이라는 단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박교수는 미술분야에서 루벤스, 피카소, 음악분야에서 바그너, 베르디, 레논, 영화에서 채플린, 문학에서 사르트르, 이렇게 총8명의 인생과 작품을 분석하면서 ‘예술가와 그 작품에 대한 정치적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각 시대상황 설명과 예술가의 성장배경과 개인적 성향을 추적하면서 그 시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권력과 야합했는지, 공존했는지, 반대편에 서서 대들었는지를 차분히 분석하고 있다. 예술을 그냥 작품으로 감상하기에 바쁜 순진한 사람들한테 제발 좀 눈 치켜뜨고 자세히 그 꼼수와 의도를 보라고 닦달하는 책이다.
대단한 책은 아니나, 예술 전공자들은 절대 쓸 수 없는 예술 비전공자이기에 가능한 글이라 기꺼이 한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커피한잔에 담긴 성공신화), 김영사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사고방식이 좀더 편한 나인지라,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책을 통해 알았는데 스타벅스는 90%의 스토어가 직영점이란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스타벅스는 프랜차이즈 기업이 아니다.) 스타벅스에는 일단 반감이 먼저 생겼다. 그래서 스타벅스보다 '잭 아저씨의 작은 커피집'을 먼저 손에 집어들었다. 그리고 읽었다. 다 읽은 후 규모키우기에는 전혀 관심 없고 친구한테 커피한잔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장사하는 잭아저씨의 사고방식과 무한정 확장되고 있는 스타벅스를 일군 하워드 슐츠는 도대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스타벅스:커피한잔에 담긴 성공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97년에 출간됐으니까 벌써 13년이나 지난 옛날 책이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정신과 기업운용철학이 그대로 담겨있는 책이라 지금도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인격적 만남과 뭐든지 체험을 중시하는 Post-modern시대 현대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사업체를 운영하고 조직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한 통찰력을 주는 책이다.
아무튼 책 내용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 자극 받은 내용을 단편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값싼 원두를 썩어서 캔에 담아 파는 것이 유일한 커피에 대한 개념으로 이미 자리잡은 미국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이탈리아의 동네 커피바 문화를 ‘경험’시켜주고 싶어 안달 난 Howard Schulz
-Howard Schulz, 이 사람의 사업하는 방식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전형적인 유대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유대적 사고를 이해하고 있으면 하워드 슐츠는 그냥 이해된다. 미국에 왜 미국 인구의 2% 밖에 안되는 유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지는 그 저력과 교육방식 영향력은 나중에 다시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리도록 하겠다.
-스타벅스에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에둘러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또 뭔가를 덮어버리고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서 솔직하게 말해버리고서는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일련의 스토리가 기록되어 있다.
-스타벅스가 커지면서 때에 따라 필요한 인물을 삼고초려해서라도 데려왔다. 하워드 슐츠는 회사가 망하거나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1.필요한 사람, 2.시스템, 3.공정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능력을 숨기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요한 사람에 외부에서 데려오고 자문을 받는 것은 성장과정에서 오는 부득이한 실수도 굉장히 줄일 수 있다.       
“올바른 멘토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을 겁내지 말아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끗이 인정하라.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충고를 구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안다면 놀랄 것이다”(p.177)
-빌 게이츠에게 스티브 발머가 그리고 앤드류 그로브에게 크레이그 배럿이, 모택동에서 주은래가 있었듯이, 하워드 슐츠에게도 그와는 상반된 성향의 인물이지만 상호보완해주는 오린 스미스가 있었다.
-외부에서도 필요한 사람을 데려오지만, 내부에서도 인물들을 키우는데 성공한 기업이 스타벅스다. ‘일 지오날레’라는 첫 구멍가게에서부터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하워드 슐츠가 왜 이렇게 부러울까? 목회를 해서 일가를 이룬 존경하는 선배목사님이 ‘개척 초창기 멤버들은 나중에 알도 못낳는 묵은 닭들이면서 꼬장만 부리기 때문에 솎아 낼 대상 1호’라고 지목하는 걸 들으면서 ‘지금 이런걸 나한테 목회 훈수랍시고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속으로 얼마나 씁쓸했는데, 영혼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 영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보다 더 세속적이라 이거참...
“나는 어린시절 언젠가 한 회사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나 만일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사람’들을 가장 중시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오직 주주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경영되는 회사는 사원들을 단지 비용절감 대상인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게 된다. 종업원들을 존경과 품위로 대해야 한다는 믿음을 깨뜨리지 않고도 주주들에게 장기적으로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공의 결승점에 혼자만 도달한다면 그 성공은 공허한 것이다. 최고의 성공은 승리자들에게 둘러싸여 그곳에 함께 도달하는 것이다.”(pp.9-13)
뭔가 대형으로 가고자 한다면, 사람을 버리고 일이 되게 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고, 결국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해서 저렇게 커진거야... 라는 나의 비판 총알 제1 탄환을 한방에 훅~가게 만들어버리는 하워드 슐츠의 고백이다. 하워드 슐츠는 적어도 현재까는 이 고백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설득해서 파트타임 직원들에게까지 당시엔 파격적인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최초의 회사가 되었다. 광고비보다 직원들 교육에 비용을 더 지출했고, 스톡 옵션도 아끼지 않았다. 하워드 비하는 ‘우리는 커피를 서빙하는 사업이 아니라 커피를 서빙하는 사람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잭 아저씨네 커피가게나 스타벅스나 사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중시하는 건 매양 한가지였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잭 아저씨는 커피가게를 하나만 갖고 행복하게 장사하고 있고, 하워드 슐츠는 수천개 매장을 갖고 머리터지게 고생하고 있다는 차이가 날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또 한번 ‘역시나 내 고정관념이었구나’하는 결론을 내렸다. 뭔가 크고 잘 되는 것에는 분명히 세속적인 방법이 동원되었고, 순수하지 않는 철학에 근거했을거야라는 내 선입관이 여실히 또 깨졌다. 고생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워드 슐츠, 그는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 무지하게 많이하고, 스타벅스를 인수하려고해서 인수한 것도 아니고, 어찌하다보니 떠맡게 되었고, 작은 커피가게였을 때의 친근함을 대형 프랜차이즈화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 작은 공동체 문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머리 터지게 고민한 사람이다. 초창기 투자자금 모으러 다니면서 당했던 서러움, 회사를 상장하면서 격었던 어려움 등등... 오늘의 스타벅스 왕국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뭔가를 이뤄냈을 대마다 ‘I did it!'을 외치며 사람들이 자기한테 스포트 라이트를 비춰주기를 노골적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We did it!'을 외치며 같이 고생한 사람들을 추켜세우고 실제로도 그들과 수익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하워드 슐츠에게서.. 목사보다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래도 남는 부스러기가 있다면 당연히 사람들과 나눠먹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왜이리도 경험하기 힘든지...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Lesile A. Yerkes/Charles Decker, 잭아저씨네 작은 커피집, 김영사

요즘처럼 비오는 날엔 진한 Espresso한잔이 간절해진다. 커피에 입문하던 시절 에스프레소가 너무 부담스러워 시럽이나 설탕 말고 Steam milk를 조금 넣어 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해보았다. 맛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Espresso Macchito였다. 정확하게 에스프레소 마끼아또는 에스프레소에 우유거품 한두스푼 넣어주는건데 나는 에스프레소와 스팀밀크를 거의 1:1 비율로 넣어 먹는다. 소주잔보다 더 작은 커피잔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다보면 커피향에 취한다. 사람들 없는 시간대에 혼자 잠시 들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마시는 커피한잔의 여유... 인생의 활력소가 이런게 아닐까?

요즘 책을 읽고 있다. 진작 사놓고 손을 대지 못한 Howard Schultz의 ‘Pour Your Heart into It' 스타벅스는 커피를 팔지 않는다. 문화와 경험을 파는 회사다. 21세기 Post-modern 목회를 이해하는데 꼭 연구해야할 Study Case인 Starbucks.... 하지만 franchise chain化하면서 거대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에 대해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균형을 잡아줄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서점 들렸다 발견한 Lesile A. Yerkes/Charles Decker의 ’Beans'... 기업형 체인점에 맞서 이긴 구멍가게 이야기 ‘잭아저씨네 작은커피집’ 이 두권을 보면 뭔가 균형이 잡힐 것 같아서 먼저 'Beans'를 읽었다.       
시애틀에서 시작된 커피전문점이 franchise chain化하면서 대박난 기업이 있다. 바로 Starbucks다. 스타벅스 설립자 Howard Schultz는 자신의 경영철학과 기업설립 그 과정을 설명한 'Pour Your Heart into it'에서 ‘우리 회사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다. 경험(Experience)과 문화를 파는 회사다.’ Post-modern시대에 사람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어떤 부분을 충족시켜줘야 열광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단순히 marketing을 정확하게 했다기보다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변화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모든 것을 Manual化 하고 직원연수과정을 통해 지구상에 어떤 매장을 가보든 똑같은 커피맛을 누릴 수 있게 만듬으로 지구촌을 상대로한 장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에게 커피 지식과 문화를 전파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비슷한 시기 시애틀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 사람들이 가족처럼 줄지어 몰려드는 또다른 커피전문점이 있다. ‘엘 에스프레소’ 기업을 더 키우기도 싫고, 돈을 더 버는 것도 싫고... 그냥 친구들에게 커피한잔 대접한다는 생각을 장사를 시작한 행복한 잭 아저씨네 커피가게 ‘엘 에스프레소’가 있다.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던 잭 하트먼과 다이앤 하트먼 부부는 그냥 손님들을 친구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커피 한잔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찾아오는 고객들과 친구처럼 얘기하고 직원들과 함께 사람냄새 나는 커피집을 운영하고 있다. 거대 기업으로 프랜차이즈화 한 것도 아니고 나스닥에 상장된 것도 아니다. 물론 가게를 운영하다보면 매출과 직원들과의 관계, ‘내가 계속 이짓을 해야하나...’라는 회의에 빠질 수 있다. ‘엘 에스프레소’의 잭아저씨 부부, 그리고 그 직원들은 4P(Passion,People,Personal,Product)의 원리 즉, 일을 해야할 이유와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고, 사람들(직원과 손님들)을 돈벌이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며, 언제나 신뢰가 가는 탁월한 제품(커피)을 만들어내면 장사도 되고 장사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사는 사람이나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19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가 열릴 때, 반세계화 시위대가 거리를 장악했어요. 이 때 엘 에스프로소 가게에는 시위대,경찰,단골손님 모두가 커피를 사기위해 줄을 섰지만, 당시 혼돈은 가게 주변에 영향을 미칠 뿐 가게 안은 혼란 가운데 자리잡은 평화로운 오아시스였어요. 마치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성을 간직한 하나의 공동체 같았다니까요.”
직원은 이런 잭 아저씨의 커피점 Vision/방향에 대해 동의/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 서로간에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서로를 배려하는 문화가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다. 고객들은 믿을 수 있는 품질의 커피를 손님이 아니라 친구로 커피 한잔 대접받는 공동체 같은 소속감을 누리고 있다. 엘 에스프레소에는 누구나 커피점을 운영하는 잭 아저씨나, 커피를 만드는 직원들이나, 커피를 사먹는 손님들이나 적어도 커피점에 들어서는 순간 현재를 즐기고 있다.
규모에 집착하여 욕심을 내는 것을 포기한다면, 작은 커피가게 하나로 먹고살면서 현재를 얼마든지 만족하고 누릴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된다. 규모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도 대형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만 버리면 자그마한 우리끼리 재미있는 공동체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텐데...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책은 추후에 올리겠다.

2016년 6월 19일 일요일

M.Scott Peck의 명저들

2005년 9/25에 M. Scott Peck이 69세의 나이로 소천했다는 소식이 New York Times 부고란과 CNN에 보도되었다.
“M. Scott Peck, Self-Help Author ,Dies at 69"       
M. Scott Peck, the psychiatrist and author whose best-selling book ''The Road Less Traveled'' offered millions of readers an inspirational prescription of self-discipline, died on Sunday at his home in Warren, Conn. He was 69. The cause was complications of pancreatic and liver duct cancer. - NYT -
 
New York Times는 그의 인생을 묘사하면서 ‘Self-Help(자조(自助)/자기계발)' Author라고 그 삶을 규명했다. 내 목회에 있어서 인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3사람의 저자가 있다. 첫째는 M. Scott Peck이요, 둘째는 김진 선생님, 세째는 Larry Crabb이다. Dr. Peck의 국내 출판된 번역서는 거의 다 가지고 있다. 특히 Non-Christian일 때 쓴 「The Roadless Travelled」는 지금도 제자훈련 필독서로 선정해서 발제를 하고 있다. M. Scott Peck은 1936년 New York에서 태어났다. Harvard College에서 B.A를 하고,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M.D를 했다. 그 후 9년동안 군의관으로 일을 하다가 코네티컷에서 1972-1983까지 개인병원을 열어 사람들을 도왔다. 「The Roadless Travelled」를 1978년에 출간했는데, 그 때는 Dr. Peck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다. 이 책 4장(은총/은혜)을 읽어보면 정신과 의사로서 도저히 상담과 약물요법에도 치료가 힘들었단 몇몇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교회다니고 예수믿더니 정신건강이 급속도로 회복되는 case들을 목격하고 복음과 예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용이 나온다. 이런 관심은 결국 Dr. Peck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드디어 1980년 Dr. Peck은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Christian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예수믿기 시작한 다음 쓴 책이 바로 「People of The Lie:The Hope for Healing Human Evil」이다. 정신질환과 귀신들림의 현상부터 악의 본질과 인간본성의 악함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의 결과물로 탄생한 저작이다. 이 때를 분기점으로 해서 Dr. Peck의 논조와 관점은 복음의 능력과 예수의 치유능력, 그리고 영적인 부분에 대한 탐구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폭이 넓어진다. 사실 스캇 펙의 저술에서 뭔가 새로운 이론같은건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기는 한테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 싫어하는 내용들을 굉장히 적나라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나 자신과 남..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집요하게 유도해서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인정케하고 스스로 자기 정신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self-help) 내용이 대부분이다. 아무튼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경험이 일천한 내가 스캇 펙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Dr. Peck의 저서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he Roadless Travelled시리즈는 3부작은 작년 열음사에서 맘먹고 기획출판했다.
그 세권은 이러하다.
1. The Roadless Travelled, 1978
2. Further Along The Roadless Travelled, 1993
3. The Roadless Travelled and Beyond: Spiritual growth in an age of anxiety, 1997
4. Denial of The Soul(영혼의 부정), 김영사
이 책은 안락사 문제를 의사의 입장에서 그러나 독실한 크리스찬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다루고 있다.       
5. The Different Drum-Community making and Peace, 춘애간호대학출판부
Dr. Peck은 이 책의 제목을 자연공동체 운동으로 유명한 Henry David Thoreau의 개념을 빌려서 지었다고 밝힌다. 소로우가 ‘사람은 저마다 서로 다른 리듬을 드럼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각자 다른 사람들의 모여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 각자 다른 비트로 스틱을 휘드르는 드러머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러나 공동체 자체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큰지 분쟁없는 평화상태를 갈구하는 구구절절한 내용을 솔직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참고로, 이 책은 시중에서 구하기는 불가능했는데, 열음사에서 판권을 인수해 출판했다.       
6. People of The Lie:The Hope for Healing Human Evil, 두란노
악마와 악의 본질을.. 그리고 인간에게 존재하는 타락한 본성, 악과의 근원적인 투쟁을 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심각하게 파헤쳐놓은 책이다. 어떻게 하면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치유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재기도 해놓았다.       
7. A Bed by the Window, 열음사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장편소설이라고만 밝혀둔다.       
8. In Search of Stones: A pilgrimage of faith, reason and discovery, 고려원
고려원에서 참 괜찮은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지금은 고려원이라는 출판사가 망해서 전부 절판된 상태다. 이 책은 Dr. Peck부부가 영국 웨일즈와 스코틀란드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여러 돌들을 살펴보면서 인생을 반추해보는 내용인데, 수필집형식으로 쓰여졌다. 잔잔한 감동과 간간히 인생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9. Love is Disciplined, 우남
Dr. Peck의 사랑론이다. 결론은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10. Gifts for the Journey(주와 함께 가는 여행), 그루터기하우스
스캇 펙, 그는 정신과 의사로 심리치료사로 일가를 이룬 후, 인생 후반기는 복음전도자로 살았다. 이 책은 회심/은혜/예수/죄/믿음/예배/교제/지혜/성령/희생/연약함/돌아옴... 이런 주제를 가지고 짧게 쓴 단편글이다. 마치 기초신앙안내 책자를 보는 듯하다.       
* 스캇 펙 홈페이지( http://www.mscottpeck.com/index.html )

정운영, 세기말의 질주, 해냄

정운영교수의 글에는 이런게 있다. 1.글 맵시의 깔끔함 왜 그 입에 짝 달라 붙는 음식을 먹은 뒤에 오는 깔끔함... 2.풍부한 사유 얄팍한 내용을 현학적으로 쓴 글들이 판을 치는 현세태에, 정교수의 글은 결코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평이한데 고민의 깊이는 대단하다. 3.적확한 문제제기 서두에서 이런저럼 농담과 비아냥... 헛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결국 이런 넋두리는 적확한 문제제기를 하기위한 애피타이져다. 4.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글을 읽어보면 그 글쟁이의 마음이 전달된다. 냉철한 분석과 신랄한 비판이 돋보이지만 행간에 숨어있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진다. 세기말의 질주... 사설과 칼럼, 기고문을 엮은 것이지만, 글있는 '맛'이 있다.

정운영, 신세기 랩소디, 산처럼

정운영교수의 칼럼을 모은 책이 나올 때마다 사서 읽는다. 본서는 가장 최근에 출판된 칼럼집이다. 이후에 '중국경제산책'이 있기는 하지만 신문과 잡지에 실린 칼럼을 모은 책은 이게 가장 최근이다. 정교수 칼럼의 하이라이트는 '피사의 전망대'다. 이후 여러 책이 있으나 '신세기 랩소디'를 읽으면서는 글이 많이 약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신랄하고 살아있는 글, 때로는 비꼬는 것조차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글이 정교수의 글이다. 그래서 읽는 '맛'이 있다. 그런데 본서는 정교수의 주특기인 '삐딱함'이 조금 무뎌진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정교수의 글을 사랑한다. 그 표현에 감탄을 발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글을 맛깔나게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맛깔난 글쓰기를 원하는 문필가들은 반드시 정운영교수의 책은 전부다 읽어야 할 것이다.

정운영, 중국경제산책, 생각의나무

한겨레신문 창간후 '전망대'라는 칼럼을 통해 고등학교 때 처음 정운영이라는 사람의 글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경기대에서 가르치는고 연구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그는 강의안과 논문보다는 천성이 글쟁이다. 그의 글에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 무언가가 있다. 본서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중국경제탐방기를 다시 퇴고해서 낸 책이다. 중국경제상황을 취재하는 탐방기로 쓰여졌지만, 중국근현대사와 문명비판.. 그리고 인터뷰 등 여러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사회주의의 시장경제화를 주창하는 중국을 둘러보면서 재벌언론(삼성중앙일보)에서 대준 돈을 써가며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사실 재벌이 쥐어주는 여비와 삼성의 정보망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취재였을거라는 예상은 된다. '말'誌나 '한겨레'가 아니라 중앙일보와 월간중앙에 실린 정교수의 글을 볼 때마다 '원고료를 더 많이 주니까 그렇겠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정교수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언론매체를 통해서건 간에 그의 글은 살아있기 때에 그의 글을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다.

정운영, 피사의 전망대, 한겨레신문사

정운영교수를 만나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나는 그의 팬이기를 자청한다. '글의 묘한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본서는 한겨레신문 출범 후 신문에 기고된 '전망대'라는 칼럼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본서의 제목을 '피사의 전망대'라고 지었단다. 이유인즉슨 삐딱하게 기울어있는 건물에서 세상을 바라보듯, 조금은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란다. 책표지에 당시 한겨레에서 그림을 그리던 박재동화백이 피사의 사탑위에 정운영이 망원경을 들고 손을펴서 햇볕을 가리고는 멀리 내다보는 illustration이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그림에서 탑은 삐딱하지만 정운영이라는 인물을 똑바로 서있다. 이 책의 논조가 그림하나에 기록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화장실에서 다 읽었다. 큰거한번 볼때마다 칼럼하나씩을 읽기에 딱~ 좋다. 화장실에서 정운영의 책을 읽는 이유는 한번에 죽~ 보기에는 글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90년데 초중반의 얘기지만 그 논리전개방식과 글재주는 음미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특히 1993년 '이론'에 실렸던 '오늘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인가'라는 아티클이 눈에 띄었다. 단순명쾌하게 설명하는 정운영의 시원함이 잘 배어있는 글이다.

정운영, 레테를 위한 비망록, 한겨레신문사


2005년 9월 토요일 아침 프레시안을 읽다가 부고를 보았다. 24일 오전 향년 62세 신부전증으로 사망, 삼성서울병원 27일 발인...  그의 부고기사를 읽고 못내 아쉬웠다. 한번은 꼭 만나봤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정운영의 글을 처음 접한 때가 고교시절이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전망대’라는 고정칼럼을 통해 그의 글을 간간히 읽으면서 ‘글 잘 쓰네...’하는 생각을 했다.(당시 고등학생이었던 89년도에 시사저널이 창간되었는데, 나는 2년 동안 시사저널을 정기구독하면서 한겨레신문보다는 시사저널의 팬이되어 당시 시사저널 고정 칼럼니스트였던 박권상,한승주,김훈,한완상,최일남 칼럼에 몰입해 있었다. 그리고 대구에서는 한겨레신문 구하기도 힘들었다) 대학 입학해서 서울 올라와서는 한겨레신문 애독자가 되었다. 설교도 일년 52주 중에 3-4번은 홈런치는데.. 칼럼리스트도 일년에 서너번은 명칼럼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정운영의 칼럼은 볼 때마다 이건 홈런.. 최소 2루타였다. 91년 한해동안 정운영의 칼럼에 푹 빠져지냈다.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한겨레신문 정운영칼럼(전망대)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다. 전공이 정치외교라 정치경제를 전공한 그의 글이 나한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하나의 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동원되는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에 찬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논리는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치열한 논리를 따뜻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감싸 놓은 글솜씨에 입이 딱벌어졌다. 그 때 생긴 소원이 ‘나는 언제쯤 정운영처럼 이정도 수준의 글을 쓸 수 있을까...’ 너무 탁월한 실력 앞에서는 본받고자 하기 보다는, 아예 기가 질려 닮고자하는 엄두를 못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운영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나가길 십여년... 나도 모르게 서서히 글쓰기 내공이 쌓이기 시작했다. 좋은 설교를 하려면 좋은 설교를 많이 들어봐야 된다. 마찬가지로 좋은 글을 쓰려고 하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봐야 한다. 정운영의 글은 나로하여금 기가 질리게 만들었지만 내 글쓰는 내공을 쌓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운영선생은 거의 격년마다 자기 칼럼을 손봐서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했다. 책이 나오는 족족 사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신문에서 이미 읽은 글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글은 책으로 소장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기꺼이 구입했다. 이미 절판된 책은 헌책방을 뒤져서라도 손에 넣었다. 그의 지적 편력을 살펴보면 정운영의 사고방식과 사상의 스펙트럼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정운영선생은 조흥은행 창업주의 동생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 대구에서 경북중학교를 나온 정운영은 아버지를 여인 후 어머니 고향인 충남 온양에서 고교를 마친다. 고교시절에는 범생이기 보다는 조금 막나가는 온양에서 유명한 학생이었다. 재수 끝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써클을 조직하고는 이론가로서 자질을 닦기 시작한다. 졸업 후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마르크스의 이윤률 저하 경향의 법칙이 최근 미국 100년의 역사에서 타당성을 가지는지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정치경제학의 대가 두사람 김수행(현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한신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부흥을 꿈꾸다가 학내개혁을 주창하가 쫓겨나게 된다. 이후 학자의 길은 잠시 접고 한겨레창간과 함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때가 그의 글쓰기 전성기가 아닌가 싶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명지대에서 가르치면서 몇년전엔 MBC 100분 토론 사회자로 활동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도 반했다.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의 글과 똑같은 분위기였다. 배고픈 한겨레신문사를 나와 재벌언론 중앙일보사로 옮겨간 것에 대해 왈가불가 말이 많다. 그의 변질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의 노선이 조금 바뀐거 같아 서운하기는 하지만, 철두철미한 글쓰는 태도와 행간에 배어있는 그의 인격은 여전했다. 나또한 그의 칼럼내용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논리전개방식과 어투, 사람에 대한 애정,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 현학적이긴 한데 독자의 무식함을 자존심상하게 나무라지 않는 배려, 나와 코드가 맞는 좌파적인 사고방식, 사태를 특이한 시선으로 분석하는 삐딱함.. 이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한다. 어설프지만 나의 글쓰기를 훈련하는데에는 정운영선생에게 진 빚이 크다. 기회가 되면 꼭한번 찾아가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지병을 앓고 있는 줄 알았으면 E-mail보낸 후 한번 찾아 뵐 것을... 아쉽다. 故人의 죽음을 애도하며.... 2005년 9월 27일 鄭雲暎선생의 발인 시각 즈음에 그의 글을 그리워하며 몇글자 남긴다.

<레테를 위한 비망록>한겨레신문사      
본서는 정운영교수의 신문과 잡지에 실린 칼럼들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다. 정교수의 다른 칼럼집과 구분되는 것은 '사법연수', '캠퍼스저널', '우리세대' 이상 3잡지와 대담한 인터뷰 내용 전문이 덤으로 '고백1,2,3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정교수의 과거행적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KBS에서 행한 대학생특장 원고 전문도 읽어볼만 하다. 마지막으로 97년 한겨레21에 기고한 대학새내기를 위한 추천도서 10권이 주목을 끈다. Yes24에서 도서검색을 해보니 이 놈의 책 열권은 거의 뜨지 않는다. 책을 추천해도 꼭 구입하기 힘든 책만 추천하는 정교수의 심보가 얄밉다.

미치 엘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세종서적

대학 졸업 후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상실한 채, 경쟁에 내몰려 치열한 피투된 삶에 허덕이던 미치 앨봄... 별가치도 없는 그러나 돈은 되는 스포츠전문 저널리스트로 활약 중이다. 우연찮게 루게릭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노은사를 TV에서 보게 된다. 용기를 내서 16년만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매주 화요일이면 인생을 관조하고 삶을 정리하는 수업을 받게 된다. 이 수업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목적, 존재의 이유를 깨닫게 되고 미치 앨봄의 돈과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는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게 된다. 14번에 걸쳐 이루어진 수업은 중년의 제자에 대한 노은사의 인생코치로 이루어진 선문답형식을 취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남은 여생을 다시한번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남은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나가는 모리교수의 태도와 지혜를 통해 많은 Insight를 얻었다. 나는 목사다. 목사라는 직업은 한 영혼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까지 뒤치닥거리하는 일을 그 업으로 삼고 있다. 이를 목회라고 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돌연사가 아닌 죽음을 누릴 수 있는 일말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보내야할지를 고민하게 해준 책이다. 벌써 내가 구입해 놓은 책인데, 아내가 먼저 읽고나서는 나에게 권했다. 책을 권하면서 아내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정서를 풍성하게 하기위해서라도 이런 책 좀 봐야 되요. 맨날 사회과학서적만 읽지말고..." 참나..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데....ㅋㅋ

WSJ편, 'Boss Talk'

나는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 책이나 읽지 않는다. 내가 일년에 기껏 볼 수 있는 책은 많아봐야 30권 정도다. 내가 70세넘게 장수한다고 가정해보자. 20대까지는 입시때문에 책을 거의 못봤고, 대학가서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들... 50년 * 30권 = 1500권.... 평생동안 정말 빡세게 책을 잃는다손 치더라도 끽해야 1500권 밖에 못본다. 현재 내 서재에 꽃혀있는 책만 1200권 정도... 이미 읽고 소장가치가 없어 버린 책이 400권...
결국 나는 내 남은 인생동안 봐야할 책을 북 list를 만들기 시작했고, 꼭 읽어야할 가치 없는 책은 서점에서 그냥 대강 훓어보고 구입하진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책을 구입할 때 몇가지 원칙이 있다. 첫번째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두번째는 읽고난 뒤에도 집에 두고 수시로 넘겨봐야할만큼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인가? 아니면 누구 줘버려도 괜찮은 책인가? 세번째는 이 책을 쓴 저자는 말만 번드르한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주장대로 살아온 사람인가? 네째는 번역서의 경우 번역이 잘 됐는가? 다섯째는 어느 장르에 속한 책인가...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오늘은 그 중에 책을 쓴 저자를 평가하여 책을 선택하는 원칙을 얘기해보자.
나는 책을 볼 때, 실제로 그 저자가 자기 전문분야에서 一家를 이룬 사람인지 반드시 확인해본다. 예를 들면 경영에 관한 대학교수의 책보다는 실제로 한 기업을 일으켜 자기 철학을 가지고 기업하는 사람의 글을 더 인정한다. 왜냐하면 학교 교수들은 탁월한 논리와 깔끔한 문장,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곁들인 설명이 풍부하다. 그러나 비록 투박하고 문법도 틀리고, 때로는 본래 줄거리에서 벗어난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기업현장을 몸소 바닥부터 체험한 ‘현장전문가’의 글에는 진실함과 경륜이 뭍어나 있기에 훨씬 감동을 준다. 현장전문가의 말에는 교수들의 현학적인 수식어나 난해하고 복잡한 설명이 없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메시지... 역시 대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2년 Dow Jones and Company에서 발간한 도서인데, WSJ(Wall street Journal)이 세계 정상급 CEO 21명과 인터뷰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런 인터뷰 기사를 읽다보면 번뜩이는 Insight를 얻게 된다. 저마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뭔가를 크게 일군 사람들의 무게가 실린 툭툭 던지는 말에서 리더십의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1명 중 몇명만 소개하면서 그들의 대답에서 얻은 통찰을 나눠보자. 각 인물에대한 소재목은 내 나름대로 붙여봤다.

1. GE의 Jack Welch - 최고의 인재양성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
먼저 잭 웰치의 말을 들어보자."나는 항상 직원들에게 결코 조직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고 말해 줍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거나 권태기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단지 조직 내 평지풍파를 원치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누구나 볼 수 있게 손을 높이 쳐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권합니다. 나는 GE에서 그러한 피해의식을 없앨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다른 회사로 옮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원들에게 피해의식을 심어 주거나 자신의 조직원을 항상 쫓아내는 관리자들을 조직에서 제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인력개발과 인재경영에 있어서 이보다 더한 교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사실상 GE는 세계 최고의 리더십훈련기관을 운용하여 최고의 직원들을 키워내고 있다.
2. Microsoft의 Steve Ballmer - 최고의 인재를 찾아 베팅하는 경영자
"저는 경영의 핵심요소를 세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 최고의 인재를 확보해서 이러한 직원들에게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명백하고 단순한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직원들이 방향감각을 갖게 되고 회사 내의 분위기가 과열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일에 정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는 직원들이 ‘나는 오늘 우리가 수행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가 달성해야할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들이 전체적인 경영목표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뚜렷하고 진취적인 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CEO는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직원들이 나아가게 만들고 이에 대해 직원이 열중할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스티브 발머는 빌 게이츠와 상의 없이 MS에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되면 그 자리에서 막대한 연봉을 제시하며 삼고초려해서 바로 MS로 스카웃 해버리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3. Cisco systems의 John Chambers - 리더를 시스템으로 복제하는 권한 위임의 경영자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이라도 복제(cookie-cut)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이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회사 전체에 걸쳐 복제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한 원칙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속도로 회사를 확장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뛰어난 인재를 모아서 이들의 재능을 개발하는 능력이야말로 실적 달성을 위한 핵심적인 결정요인이므로 지도자는 회사가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이들의 재능을 개발해 내야만 합니다. 즉 자신의 회사가 18개월마다 100%씩 성장하는 경우 현상유지를 위해서는 리더십 팀의 규모도 매 18개월 마다 두배로 늘려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4. DaimlerChrysler의 Juergen Schrempp -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고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는 리더십 "합병된 기업의 직원들은 실제로 변화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합병 후 최초 12개월 또는 18개월 동안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직원들은 정체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모두 변화를 예상하고 있을 때, 변화를 일으키면 그것에 대한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안정되고 있는 상태에서 변화를 추진하면 훨씬 강한 내부적 저항에 부딛히게 됩니다."
"우리 회사의 경우 이사회에 상정되는 모든 제안에는 2쪽 분량의 요약본을 첨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약본 다음에 나오는 20쪽은 들쳐보지도 않습니다.”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를 합병하면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위르겐 슈렘프... 사실 세상의 어떤 문제든 A2 2장이면 그 내용의 핵심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5. Citigroup의 Sanford I. Weil -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과 정보공유로 화합을 유도하는 금융의 대가
"기업 M&A를 추진할 때,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야 합니다. 담당직원 선정 등의 의사결정을 지체하게 되면 유능한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고 결국은 평범한 직원들만 남기 쉽습니다.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지 않고 계속 뒤로 미루면 직원들은 자신의 회사에 대한 기대감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직원에게 현재 진척 상황과 결정된 사안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젊어서 금융업에 뛰어들어 은행현장업무 바닥부터 경험한 센포드 웨일... M&A를 통해 덩치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규모에 걸맞는 기업문화 통합을 이뤄내면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금융공화국을 설립한 인물이다. 
6. Novartis의 Daniel Vasella - 소기업의 혁신정신과 대기업의 효율성을 겸비하고자 한 과학자이자 경영자
"규모는 확대하면서 소기업의 진취적 정신은 어떻게 그대로 유지해 나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대기업이 가지는 규모의 경제 이점과 소기업이 갖고 있는 강한 정신력을 동시에 구비한 경영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 관건이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는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됩니다. 애벌레는 놀랄만한 변태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기업도 인수합병을 통해 확장될 때 다음 단계에 어떤 적절한 규모와 형태로 변해야 하는지 파악하지 않고서는 변화를 견뎌내기 힘들겁니다.“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거대 제약회사 노바티스... 미국에 노바티스 게놈 연구소를 설립해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연구개발로 인한 신약출시와 연평균 두 자릿수의 매출증가로 연구와 경영에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과학자이자 경영자 
7. Talk Magazine의 Tina Brown - 독자적인 브랜드 구축의 일인자
"사람들이 잡지 중간을 편 상태에서 바닥에 던졌을 때, 그 잡지가 무슨 잡지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게 나의 지론입니다. Newyoker 매거진을 예로 들면, 그 활자체를 금방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바닥에 던졌을 때 우선 만화가 보이고 그 밑에 특이할 활자체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사의 논점이 남달라야 합니다.“ 그냥 찍어본 임신한 데미 무어의 사진을 표지로 가자고 결정한 잡지 편집인... 이미지를 통해 브랜드를 각인시킬 줄 아는 미국 잡지출판업계의 다크호스
8. Amazon설립자 Jeff Bezos - 자기 관리의 달인
“화요일과 목요일을 재충전의 시간으로 정하고 이 두날 동안은 아무런 일정도 잡지 않습니다. 나머지 주중 3일간은 사내의 여러 임원들과 회의를 포함하여 꽉 찬 일정을 보냅니다.” 바쁘다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사람이다. 
9. MTV network의 Tom Freston
"나는 직원들이 우리 회사를 아담하게 느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가 대기업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의 기본 발상은 회사를 뭔가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소규모 부티끄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음악방송이라는 창의적 업무에 맞는 소규모 조직(소그룹)의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아는 인물인거 같다.
10. Limited Inc. 설립자 Leslie Wexner - 같이 일할 사람을 분별해내는 감별사
"사람을 만날 때, 세가지를 살핍니다. 우선 자신의 업무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파악합니다. 두번째로 건전한 사람인가를 봅니다. 균형잡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정상적인 사람인지 또는 지역사회를 염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를 파악합니다. 누군가 내게 ‘이 사람이야 말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추천하더라도 알고보면 단지 일중독자일 수 있습니다. 자기 생활이라곤 없는 이런 사람은 궁극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직원들로 가득 찬 회사를 만들어나가길 바랍니다. 세번째로 이들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정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봅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를 진정 염려하는지 파악합니다. 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11. Walmart CEO H.Lee Scott
"경영체제 전환을 위해 도출한 방법은 파트너쉽이었습니다. 이는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와 ‘오늘 우리는 이 작업을 할겁니다.’라고 통보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이는 ‘여기 우리가 고려중인 사안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있습니다. 이 중 무엇을 달성하고 싶으십니까? 어떤 것이 당신 마음에 드십니까?’라고 제안하고 토론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12. Dell 컴퓨터의 Michael Dell은 온라인 주문을 받아 몇시간 내로 컴퓨터를 조립해서 요청한 사양에 맞게 당일에 바로 배송하는 방식으로 재고를 줄이고 현금유동성을 극대화한 21세기 유통의 혁명가...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이미 흘러버려 적실성은 떨어지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여러 대가들한테서 한수 배운 기분이다.

조셉 나이, 소프트 파워, 세종서적

인간의 근본적 욕구 중에 하나가 ‘권력을 향한 욕구’(권력욕)이다. 성경에서도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욕구를 세가지로 정리했다. 창세기 3장 6절에서는 “먹음직/보암직/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육, 이생의 자랑”이라고 설명했다. 영성신학자 Richard Foster는 이를 돈,섹스,권력으로 정리했고, 공자는 財,色,權을 조심하고 하였다. 모든 것을 돈으로 설명했던 K. Marx, 또 인간의 모든 문제를 Libido라는 성욕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S. Freud, 마지막으로 인간의 권력에 대한 의지와 집착으로 세상을 설명하고자 했던 F. Nietzsche의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이상 3가지 욕구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욕구이다. 이중 하나님과 비교될 정도로 가장 강력한 미혹이 돈에 대한 미혹이다. 돈이 있으면 성욕은 채워지며, 권력도 쥘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에 인격을 부여해 Mammon이라 지칭하며 돈을 신이라고 평가하며,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짤라 말했다.       
오늘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세번째 욕구 ‘권력’에 대한 집착이다. 사람들이 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일까? 권력(power)는 영향력(influence)이다. 사람들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고 내가 시키는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래서 권력은 돈,성과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있다. 사람들이 내 말에 복종하는 것을 맛본 사람들은 이 맛에 중독된다. 내 명령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거... 이거 생각보다 쾌감이 엄청나다. 이 맛에 푹~ 빠져있다가, 언젠가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돌어버리는거다. 그럴때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내 말에 복종하게끔 만들려고 한다. 이때부터 퍄쇼, 공포정치,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돈이나 성과 마찬가지로 권력도 내가 통제가능할 때는 괜찮으나.. 권력은 그 속성 자체가 '惡'하다. 처음엔 사람이 권력을 사용하지만, 나중에 중독이 되면 권력이 사람을 장악하고 조정하게 된다. 그래서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되어있다." 정치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종교권력이다. 처음엔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겸손하게 사용하나... 사람들이 자기 말에 복종하는 것에 맛들이다보면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고, 자기의 의도를 관철시키려든다. 결국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절대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교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어느 목사도 처음엔 다 겸손하고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사역한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power가 생기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이를 견제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할 요랑으로 깔뱅(John Calvin)은 쥬네브(제네바)에서 장로정치제도를 구상했던 것이리라. 아무튼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온 우주의 절대주권자, 절대 권력자는 하나님 한분 뿐이다. 나는 심부름꾼.. 비록 내 손에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있다하더라도,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힘일 줄 착각하는 그날....자기 정체성을 까먹게 되는 그날... 나는 교주로 등극하고, 하나님의 억장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주님 내 주제파악을 언제나 하게 하시고, 주변에 나를 정직하게 되돌아보게 해줄, 믿을만한 믿음의 동지를 주시옵소서....
사람들을 복종시키기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무력(군사력, 물리력)이다. 힘이 있으면 사람들은 고분고분해진다. 마키아벨리가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마오쩌뚱 또한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대놓고 하고 다녔다. 깡패 앞에서 사람들은 복종한다. 그러나 무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복종이지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복종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이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의 자발적인 순종과 협조, 열정을 이끌어내는(pull) 것이지, 감시하고 억지로 시키고 조지고 밀어붙여서(push)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순종보다 복종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leader보다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boss가 필요한 상황이 분명히 있다. 시간과 비용의 측면에서 볼 때, 그냥 강력한 drive를 걸어서 밀어붙이는 것보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합의를 도출하고 순종하게 만드는데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러나 진정한 Leadership은 정당한 명분과 가치를 내걸고 사람들로 하여금 따라오도록 만드는 것이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이런 원리는 국제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평소 내 생각의 폭을 한층 넓혀준 한 인물을 1990년에 만나게 되었다. Joseph S. Nye, Jr 교수이다. 이 양반은 Harvard's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학장이다. 개인적으로 조셉 나이를 알게 된 것은 91년 그의 논문과 책을 통해서이다.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카터 정부와 클린턴 정부 때 동아시아 정책과 미국 대외정책 입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부시정권에서는 찬밥신세로 지내고 있다. 조셉 나이는 연배(66세)나 지명도, 실력으로 봤을 때, 벌써 국무장관이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어야할 인물이다. 이번에 민주당 케리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면 조셉 나이의 논리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되었을 것이다.       
1990년 조셉 나이의 논문 한편이 발표되었는데 그 때 처음 등장한 용어가 Soft power이다. 이는 Hard power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하드 파워는 군사,경제력을 뜻한다. 세계 여러 국가들로 하여금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드는 강력한 힘이다. 이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얼마든지 조져버릴 수 있음을 뜻한다(경제봉쇄정책, 반미정권무력진압 후 친미정권수립), 하지만 ‘Hard power만으로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조셉 나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Soft power가 평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호의를 이끌어내어 협조를 보장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바로 Soft power이다. 조셉 나이는 한 국가의 soft power를 세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는 데, ①세계인에게 매력적인 문화 ②정당한 정치적 가치관 ③누구나 납득할 만한 대외 정책이 그것들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문화가 대중매체를 타고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미국 문화가 가장 앞서가는 문화요, 미국 영화를 보며 세계인들은 미국을 선호하게 된다. 전후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서조차 미국은 선망의 국가가 되었다. 또 인권을 보장하며, 정의가 살아있고, 법에 의해 정당한 권력이 행사되며, 약자가 보호되는 미국의 정치적 가치관이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 미국... 미국은 제3세계 독재정권에 인권을 보장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개선되지 않을 경우 무력진압과 경제제재를 주었다. 세계 어떤 나라도 미국의 이런 권력행사를 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의 문화는 소비 퇴폐문화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이라크국민들을 후세인독재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치른 전쟁에서 이라크 포로들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고, 미국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대외정책은 세계인들의 반발만 사고 있다. 조셉 나이는 현 부시정권이 Hard power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soft power를 무시했고, 결국 로마제국 이래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Soft power와 Hard power를 때에 따라 적절히 사용할 때 영향력은 극대화 된다. 사람과 조직과 국가와 세계를 바꾸는데는, 힘만으로 밀어붙여도 안되고, 설득만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 두가지 힘을 필요에 따라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2004년 12월 Joseph S. Nye의 책한권이 출간되었다. 당장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2주나 걸려서 읽었다. 이미 10년전에 소개한 논문을 더 구체화 시켜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04년에서 0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조셉한테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해서 한수 배웠다. 책을 읽는 내내.. 목회현장에서 성도들과 교회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할지... 별에별 생각이 다 들었다...하하... 이거 목회를 너무 정치적으로 하려고 드는건 아닌지...허허.. 어쟀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리는 목회든, 회사든, 인간관계든, 국제관계든... 어디든 통한다.

피에르 신부, 『피에르 신부의 고백』, (마음산책:2002)

피에르 신부, 『피에르 신부의 고백』, (마음산책:2002)       
 
본서의 머릿말에서 삐에르 신부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50년 넘게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발언을 할 기회를 가졌다. 그건 언제나 ‘이 땅이 인류 모두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본서는 신부님의 어록 비슷한 책이다. 전체 279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문장은 특별한 연계성 없이 발췌된 것이다. 신부님과 그 삶에 대해 전혀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책부터 손에 들고 읽는다면.. 뭔 소린지 모를것이다. 그러나 이미 아베 신부님의 책과 그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한문장 한문장이 어떤 의도에서 내뱉은 말들인지 알 것이다.
      
내가 읽으면서 check해 놓은 몇 문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97. 평화를 얻는 데도(전쟁 때보다도 더한) 전적인 헌신이 요구된다.
110. 불의란 불평등이 아니라 나누지 않음이다.
130. 하나님, 배고픈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자들에게는 배고픔을 주십시오.
137.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고통받는 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성적 고찰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마음과 우정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듯 곁을 지켜주는 존재이다.
143.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먼저 보살피라’는 법을 지키는 한 문명은 살아남는다. 가장 힘 있는 자들을 먼저 섬기는 순간부터 그 문명은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
162. 그들이 무력감과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내일 밤 어디서 자야 할지 알지 못하는 불안감뿐만 아니라, 씻지 못하던 기억과, 더러운 옷 때문에 느끼던 남모르는 수치심까지도 기억하지 않게 하소서...
215. 그렇다. 살인이 벌어지는 장소들 주위 곳곳에는 살해된 이들보다 더 끔찍한 희생자들이 남아있다.
217. 인간의 유일한 자유, 그것은 계속 돛을 펼치고 있을 것이냐 아니면 지쳐 그것을 놓아버릴 것이냐 하는 것이다. 바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276. 어째서 ‘안락한’ 나라들에 사는 우리만 거의 백살 가까이 살 수 있고, 그들은 아니란 말인가? 언제나 여전한 이 부의 분배문제!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다.
여러 문장들 중 가장 나를 압도한 255번 문장을 소개한다.
255. 나는 언론에게 그 게으르고 안이한 태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간청한다. 피에르 신부라는 이 신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편한 구실에 다름 아닌 이 불건전한 숭배를 고발해야 한다. 피에르 신부에 대한 생생한 묘사, 그의 건강이 어떻고, 그의 체온 그래프가 어떻고, 그가 받은 수술들이 어떻고...... 제발 그만! 중요한 것은 천막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과 아이들이다. 우상이라니?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우상을 모독하는 이가 나다! 나의 할일을 하도록 그만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라!
따라갈만한 영적 스승을 만난 기분.... 나중에 다시 한번 빠리를 들린다면, 반드시 아베 삐에르를 찾아가리라... 생각했는데 2004년에 선종하셨다. 돌아가신 이후 출간된 '유언'(웅진지식하우스)와 '하느님 왜?'(샘터)도 읽었는데 이건 나중에 첨부하겠다.

아베 삐에르-베르나르 쿠슈네, 『신과 인간들』, 장락

아베 삐에르-베르나르 쿠슈네, 『신과 인간들』, (도서출판 장락:1995)

아베 삐에르는 프랑스 Emaus공동체를 설립하여 집 없는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펼친 카톨릭신부님이다. 베르나르 큐슈네는 세계 분쟁지역을 비롯하여 기아와 질병으로 허덕이는 곳에서 의료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설립자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헐벗은 사람들을 부퉁켜 안고 흘리는 눈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인간사랑 방법은 같지만, 동기는 다르다. 아베 신부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닥터 베르나르는 최소한의 인간대접을 못받는데 대한 분노에 근거해서 각자 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있다. 본서는 이 두사람의 대담집이다. 행동하는 프랑스의 두 양심의 대화에서 참 여러 주제가 등장한다. 2001년 2월 3일 토요일 05:37에 도곡동 방에서 다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난 후 표지 다음장에 내가 몇자 적어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본다.
      
- 인도주의, 인간에 대한 연민
- 조직화, 운동, 호소, 자기갈등, 건강악화
- 내분, 처음 정신의 퇴색
- 표면 치료와 근본 치료, 예방까지...
- 현실적 대안 모색
- 역사(교회사)를 통해 배우기
- 분노의 창조적 역동성이 일을 낸다.
- 개인 기도/침묵의 시간/觀想/분주함 속에 고요함 

아베 삐에르, 『당신의 사랑은 어디있습니까?』 바다출판사

아베 삐에르, 『당신의 사랑은 어디있습니까? - 칼럼집』(바다출판사:2000)
 
프랑스를 대표하는 공동체운동의 아버지가 두 사람있다. 한분은 떼제공동체를 만든 ‘로제’수사이고, 한분은 엠마우스공동체를 만든 ‘아베 피에르’신부이다. 이 두사람이 2차대전 후 프랑스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이 두사람이 만들어 놓은 용서와 화해, 사랑의 실천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지금도 현대 프랑스인들의 심성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다만 이 두거장의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떼제공동체가 시골 한적한 곳에 있는 수도원적 영성공동체인 반면에 엠마우스는 도시 한가운데 있는 현장영성이다. 한국상황에 비추어 비교해보자면, 로제수사가 예수원의 대천덕신부라면, 아베 피에르는 다일공동체의 최일도목사나, 두레공동체의 김진홍목사라고 할 수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노숙자, 빈민, 상처받고 굶주린 자들에게 사랑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나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서적 얘기를 해놓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상처입은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 평생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살아간 노 사제의 담담한 고백을 보면서 다시한번 사랑하는 방법과 마음가짐을 배운다.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이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쁨'(마음산책刊)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피에르 신부님의 시대를 보는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신과 인간들'(장락刊)을 보면 된다. 본서는 피에르신부의 칼럼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이다. 200여년 전 혁명과 동시에 이 세가지 혁명정신의 유포는 근대로의 전환을 촉발시켰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이 '남을 착취하고 죽일 수 있는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에 반기를 들어 평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획일적 평등을 이룬답시고 전체주의가 등장하여 인류의 삶은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베 피에르신부는 자유와 평등 정신을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품고 사랑하는 '박애'가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는 박애를 형제애, 섬김의 연대로 표현한다. 집없고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인종/민족/국가를 돕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여 형제애를 발휘한다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놀라운 통찰이다. 자유와 평등은 박애를 통하지 않고는 주어지지 않는다. 깊이 묵상해 볼 말이다. 본서는 이 박애정신의 실천을 위해 고민하는 신부님의 칼럼들이 들어있다.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2001:마음산책)

1997년 겨울 또 한명의 따뜻한 분을 책에서 만났다. 프랑스에서 빈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Abbe Pierre신부님이 그이다. 1912년 리옹의 상류층가정에서 태어나 열아홉살에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회(학문보다는 경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민중적 수도회)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된다. 7년간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혼의 풍성함을 누릴 때... 2차대전이 발발한다. 유럽전역에서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시행되자 그 참상을 목격하고선, 바로 항독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게 된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엄난한 세상을 떠나 별천지같은 수도원에서 하나님과의 단독면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세상을 사랑한 하나님’(요3:16)을 따라 현실세계문제에 참여하고자 레지스탕스로 국경을 넘나들며 유태인을 위해 도피처와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주며 저항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하게 된다.(그러나 신부님은 자신의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적 활동의 에너지 공급원은 바로 7년간의 하나님과 단독면담에서 축척한 영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 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복지정책 입안을 주도했다. 그러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 Emmaus공동체를 설립해 그들과 함께 살면서 H.L.M.(빈민들을 위해 건설한 주택단지)건설에 힘을 쏟았다. 끔찍스럽게도 추웠던 1954년 겨울, 버려진 폐차 속에서 얼어죽은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생방송 중인 라디오방송국으로 뛰어들어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호소하여 엄청난 감동과 파문을 일으켰다.

이 일화를 소재로 한 그의 삶이 ‘겨울54’(이 영화 비디오 테입 우리 집에 있다)라는 영화와 샹송으로도 만들어져 지금도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프랑스 정부에서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2급, 3급 훈장(인권 부문)을 수상한 그는 카톨릭 교계뿐 아니라 국내외 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아베 삐에르를 지칭하여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 부른다.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2001:마음산책)       
삐에르 신부님의 자전적인 기록인 ‘단순한 기쁨’에 소개된 한 얘기를 내 방식대로 옮겨보고자 한다.
전쟁이 끝나고 선거유세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후보로 입후보한 삐에르 신부님은 거리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편 후보진영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신부님의 연설을 방해하는 소란을 피우며 연단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온갖 흑색선전과 음해가 난무하는 가운데 신부님의 연설은 더 이상 계속 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 때 저 뒤쪽에서 눈빛이 살아있는 초라한 노인네 한명이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방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권위가 서려있는 노인네의 표정과 단호한 말투에 사람들은 잠시 입을 다문 것이다. 노인네는 연단 위로 올라섰다. 마이크를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삐에르 신부님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금 들었던 욕설만큼은 참을 수가 없군요. 신부님께서는 저를 알지 못하십니다. 저는 샘 욥이라는 유대인 랍비입니다. 독일군 점령 당시 어려움에 처한 제 친구들을 신부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밤 신부님 친구 분들의 안내를 받아 산으로 피신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 중 친구가 헌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선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구두를 벗어주시고, 눈길 위를 맨발로 걸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아는 신부님은 그런 분입니다. 당신들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해서 신부님을 지지하지 않더라고 인격적인 모독을 하거나 음해를 하거나 욕설을 퍼붓지는 마십시요. 신부님은 당신들한테 그런 욕먹을 만큼 지저분한 삶을 산 분이 아닙니다.” 랍비의 발언이 있은 후 유세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사람들은 전율할 만큼 감동했고, 이 추억을 떠올린 랍비와 삐에르 신부님은 감격해서 서로 부등켜안았다. 난잡한 정치판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신부님을 그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사람을 분리시키지만 연대행동은 사람을 결합시키는 법이다.”
아베 삐에르 신부님의 자전적인 회고담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회는 이런건데... 아..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 삐에르신부님의 삶에 감격해서 울고... 메마른 내 자신과 척박한 목회현장 때문에 또 울었다. 이 후 나에겐 간절한 소원 하나가 생겼다. 열악한 상황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목회를 하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서로 교감하며 ‘마음’을 나누는 목회를 하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목회 사역... 일에 치이다보면 언제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영혼들간의 접촉이 목회임을 자꾸 망각하게 된다. 목회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만남이며, 인격과 인격.. 사람간의 감동있는 인격적 접촉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나눔이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눠주는 것이며, 내가 가진 돈과 물건을 나눠주는 것이며, 내가 가진 지식과 knowHow를 나눠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명과 복음을 나눠주는 것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또하나 든 생각...
아베 삐에르는 humanist이기 이전에 Evangelist다. 나는 ‘카톨릭에 구원이 없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카톨릭 내에도 복음주의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신교 내에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존재하는가! 물론 분명히 카톨릭에는 성경에도 없는 비진리를 진리로 가르치는 잘못된 부분이 틀림없이 있다. 하지만 카톨릭 가운데도 복음을 믿고 공식적으로 비진리에 반박하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 교황청에서 주장하는 비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
‘단순한 기쁨’은 아베 신부님 자신의 자전적 얘기를 서술한 책이다. 그런데 책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고 있다. 자전적 얘기보다 복음을 설명한 내용이 더 많다. 카톨릭 사제인데도 복음주의자다. 놀랍다. 카톨릭에 대한 나의 편견을 다시 한번 재고케 하는 책이었다.
 
이사진은 앙리 까르띠에 쁘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찍은 아베 신부님...

고정욱, '아주 특별한 우리형'(대교출판:1999)

한 나라의 수준은 장애인을 대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장애자는 몸상태가 좀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할 때가 많다. 좋게 표현해서 비인격적 대우이지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병신취급’한다는 것이다. 본서는 시골에서 친척 수녀 할머니와 함께 살던 뇌성마비 장애자인 형이 할머니의 죽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오랜동안 장애자 아들을 직접 키우지 못한 부모의 미안한 마음... 갑자가 나타난 보기흉한 형 종식을 용납하지 못하는 종민이.. 친구들.... 장애인 주차장에서의 다툼... 그러나 결국 사랑이라는 끈으로 가족은 회복된다. 같이 살면서 자연스레 형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장애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일으킨 종민이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는 형의 재활은 장애자의 존재목적과 의의를 부각시킨다. 우리의 아이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인식의 변화를 위해 꼭 읽혀야할 책이다. 장애는 크게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신체장애와 정신지체..... 신체장애인은 몸이 좀 불펼할 뿐이지만, 정신지체장애인은 의사소통과 인격적인 교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뇌성마비는 신체장애이다. 정신은 멀쩡하다. 그들을 돕다보면 몸이 좀 고달파서 그렇지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할만하다. 그러나 정신지체장애인은... 정말이지 힘들다. 자폐아도 마찬가지... 신체장애보다 정신지체장애인에 대한 복지를 늘리는 것이 더 큰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어린이들에게 '장애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교육시킬 교제로 아주 괜찮은 책라 생각한다. 저자 고정욱 자신이 장애인이라 책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경험담을 소재로 쓰지 않았을까?

다카시나 슈지, 「예술과 패트런-명화로 읽는 미술 후원의 역사」, 눌와

高階秀爾(다카시나 슈지), 「예술과 패트런-명화로 읽는 미술 후원의 역사」

예술 작품을 그리고/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 뒤에는 예술가들이 그리고/만들도록 요청하고 주문하고 비평하고 후원하고, 돈 대주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Patron이라 부른다. 패트런을 이해하고, 패트런과 예술가들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작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은 시대별로 패트런 시스템 운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15세기 르네상스 전성기가 피렌체에서 꽃 핀 것은 메디치가문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뒤를 봐주며 돈을 대고 후원한 것은 메디치 가문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문들도 있고, 특히 동업자 조합(직물조합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서명의 방’ 벽화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그린 것이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제작 의뢰와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프랑수아 1세가 당시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받아들여 수많은 작품들을 매입하고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후원한 사실은 유명하다.
루벤스는 스페인 필리페 4세에게 , 또 영국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고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은 화가라기 보다는 직업 외교관 내지는 귀족 기사처럼 보인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에 대한 대항으로 가톨릭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통해 가톨릭 자체 내에서 개혁을 추진한다. 이를 반동종교개혁이라고 하는데 이 회의에서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화나 조각 등 예술 표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우리는 구원의 신비한 이야기를 회화나 그 밖의 수단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중이 신앙의 조항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마음에 간직하도록 교화 육성할 것”이라는 결정은 바로크 미술 발전을 재촉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엄격한 금욕적 태도 때문에 회화나 조각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가톨릭 성당이 더 호화롭고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바로크 예술은 교회의 보호 아래 발전했다. pp.88-90.

17세기 말 소수의 부유한 시민(예를 들면 은행가로 카라바조를 열렬히 후원하고 지지한 빈첸초 주스티니아니 등)도 있다. 하지만 로마의 오랜 명문가가 몰락해 가던 이 시기에 나타난 유력한 패트런은 교황청과 관계 된 고위 성직자였다. 니콜라 푸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 때문이다. p.98.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로테스탄트가 대세였다. 스페인처럼 엄격한 이단 심문도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나 종교전쟁도 없었다. 정치 종교적 관용이 넘쳐나는 분위기의 네덜란드에서 경제가 발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유럽 다른 나라들 보다 훨씬 일찍 이 시기 네덜란드에는 전문 화상이 생겨났다. 베르메르의 아버지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성 루가 조합에 등록된 ‘미술상’이었다. 매형도 고급 액자상으로 유명한 화상이었다. 베르메르 자신도 화상으로 활동했다. 조합 뿐 아니라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시민단체도 패트런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집단초상화’ 장르가 나타난다. 이 집단초상화는 오늘날의 단체 기념사진과 같은데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이 의뢰한 집단초상화다. 또 렘브란트의 명작 ‘야경’은 암스테르담 시민대(화승총조합)이 주문한 집단초상화다. pp.103-111.

돈 있는 귀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예술 작품 감상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미술관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은 ‘프랑스 혁명’의 결과다.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한 것은 혁명정부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미술품 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전쟁으로 정복한 외국 각지에서 조직적으로 회화나 조각을 파리로 가져와 미술관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미술관이 등장하고 전람회 제도가 확립되자 미술작품을 향수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음악 세계에서 예전에는 모차르트가 그러했듯이 주로 교회나 왕후귀족의 살롱이 연주의 주요 무대였다면, 콘서트홀 내지는 극장에서 많은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를 하는 오늘날과 같은 형식이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이다. 감상 형식의 변화가 지니는 의미는 두가지다. 첫째, 예술 작품이 장식이나 권위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예술’로서 즉 미적 목적을 위해 감상된다는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둘째, 한정된 특정 감상자층으로부터 열린 불특정 감상자층으로의 확대를 가져왔다.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한 석판화의 등장은 미술애호가의 수를 급증시켰다. pp.129-134.

프랑스혁명 이전 17세기 태양왕 시대에 설립된 회화조각 아카데미 전람회는 예술가등이 유명세를 타며 등장하는 등용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예술가들의 유일한 공식발표 기관이었던 아카데미의 전람회가 점차 경직되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혁명 이후 여러 형태의 개인전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1864년 살롱의 심사는 어느 해보다 엄격해서 낙선된 화가들 사이에 불만이 높았다. 그 소리가 귀에 들어갔던지 나폴레옹 3세는 살롱 개막 직전에 회장을 찾아와 낙선 작품으로 살펴본 후, 살롱과는 달리 낙선 작품만을 모은 전람회를 열라고 명령했다. 이 낙선전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고 떨어진 그 유명한 ‘풀밭 위의 식사’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마네의 명작이 전시되었다. 결국 예술원이 창설되면서 예전의 살롱에서는 아카데미 회원이라야만 출품이 가능했던 제도가 폐지되고, 19세기 살롱에서는 ‘자유/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실제로 외국인을 포함해서 누구한테나 문호가 개방된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은 파리로 몰려들게 된다. 이런 배경이 파리가 국제적인 예술 도시가 되는데 큰 요인이 되었다. pp.130-172.

예술작품 관객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출품자 수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경험이 얕은 관객은 수많은 작품을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편 예술가들도 직접 주문을 받는 일이 적어졌고, 따라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거기에서, 관객에게는 작품의 의미나 질이 좋고 나쁜지를 가르치고 예술가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충고하는 중개자로서 미술비평가가 등장하게 된다. 당시 문인이면서 미술비평을 활약했던 인물로는 스탕달, 보들레르, 테오필고티에, 졸라 등이 있다. 본인이 화가이면서 미술비평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들라크루아다. 들라크루아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푸생 같은 대가부터 피에로 폴 프뤼동, 제리코, 코로 등 동시대 선배 화가들까지 논한 작가론을 발표했다. 괴테도 당시 유명한 미술비평가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필렌’이라는 잡지를 통해 회화 콩쿠르를 기획하기도 했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출품했을 때 신문비평은 ‘뻔뻔스럽고 너절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에밀 졸라는 마네를 옹호하는 평론을 써서 ‘풀밭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는 장래에 루부르 미술관에 소장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적으로 큰 권위를 지니고 있던 아카데미파에 대항하여 등장한 혁신적인 전위파와의 대립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예술 운동의 옹호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활동한 최초의 화상은 뒤랑 뤼엘이다. 뒤랑 뤼엘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1874년 ‘인상파전’이 재정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랑 뤼엘은 계속 인상파들을 원조했고 2년 후에 열린 제2회전 때는 자신의 화랑을 전시장으로 제공하고 1882년 제7회전 때도 전시장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자신의 화랑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개인전을 개회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 인상파, 후기 인상파, 나비파, 포비슴, 큐비즘 등 근대 미술사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예술 운동에 끊임없이 눈을 돌리고 재빨리 뛰어난 재능을 찾아냈던 사람이 바로 앙브루아즈 볼라르다. 볼라르는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 고흐가 죽은 후 최초의 회고전을 했으며, 1901년 피카소의 첫 개인전, 1904년에는 앙리 마티스의 첫 개인전을 조직했다. 앙리 루소의 작품을 처음으로 산 것도 그였다.
2차대전 후 미술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페기 구겐하임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정부가 예술작품을 발주하면서 관공서가 패트런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 문화부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 20세기 예술 기념물을 남기기 위해 마르크 샤갈에게 천장화 제작을 맡겼다. 모차르트의 ‘요술피리’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에 이르는 열네 작곡가의 작품을 주제로 한 샤갈의 천장화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명물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거물급 컬렉터는 재벌들이다. J,P.모건, 록펠러, 밴더빌트.... 삼성...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참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콩쿠르/전람회 개최하고
1.전시 특권 제공/ 도록제작/ 판매 대행/ 미리 구매
2.상금 수여
3.적어도 1년 이상 작업공간 무료 제공
등등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거 밀어주는 錢主들이 별로 없을까? 돈 벌어서 투자와 재산 은닉 목적으로만 예술작품 구매하지 말고,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고자 하는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다카시나 슈지, 미의 사색가들, 학고재

지구상에서 정보 요약의 달인들은 전부 일본사람이 아닐까... 싶다. 일본 민족성 자체가 정리/요약에 능한게 아닐까? 복잡한 사상과 이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입문서로 손에 쥐게 되는 책들은 거의 다 일본사람이 쓴 책이다. 내 경우, 서양미술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첫 책이 바로 高階秀爾(다카시나 슈지)의 ‘명화를 보는 눈’이다. 재미와 통찰, 요약과 정리, 깔끔하고 쉬운 설명... 다카시나 슈지에 반했다. 그러다 번역되어 있는 그의 책을 두권 더 구입했다.

이 책은 저자가 ‘명저 다이제스트’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1년동안 연재한 글을 다듬어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독서보고서’라고 밝히고 있다. 1930년대 이후 유럽의 주요 美術史家/비평가들의 논리와 논문/저서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다. 총 22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먼저 각 미술사가/비평가의 인생사를 몇문장으로 요약한 다음, 중요 저서의 내용과 그 공헌을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읽힌다. 이 책 한권만으로도 일반인이 미술사 연구에 꼭 읽어봐야할 저서들을 대충 한번 다 훓어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각 chapter별로 읽으면서 줄쳤던 부분을 옮겨본다.

제1장 엘리 포르『형태의 정신』
포르는 틀에 박히지 않은 유연한 感想眼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의 본직이 임상의요, 생물학자로서 전문 역사가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기존 미학이나 역사에 의거한 가치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감식가’나 역사가가 어떤 작품이나 양식을 마주하고 다른 작품과 상이한 독자적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일 때, 포르는 시대나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미술작품에서 공통된 표현을 찾아내, 그것을 단서로 ‘형태’의 본질에 다가서려 한 것이다.

제2장 에우헤니오 돌스『바로크론』
에우헤니오 돌스는 1882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돌스는 피카소나 가우디와 마찬가지로 핏속까지 바르코적 요소를 갖고 태어난 비평가였다. 당시는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바로크 건축은 르네상스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야한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니체는 "예술이 퇴폐에 빠질 때 바로크가 된다.”라고 하며 르네상스 시기 완성된 고전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바로크는 열등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던 시기였다. 이에 대한 세기말적 바르셀로나에서 자란 돌스는 이렇게 대든다.
“바로크의 성격은 정상이다. 만일 바로크를 병적이라고 한다면 ‘여성은 영원한 병자이다’ 즉 여성들 모두는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공주병환자로 봐야 한단 말인가? 바로크는 고전주의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보다도 훨씬 근본적으로 고전주의 양식과 대랍하는 것이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결국 바로크적 상수의 전개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고전주의 양식이란 ‘중량감을 지닌 형식’이며, 바로크 양식이란 ‘飛翔’하는 형식‘이다. 고전주의 양식이 질서와 통일을 기본 성격으로 삼는데 비해, 바로크 양식은 혼돈과 모순을 본질로 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뵐프린이나 포시용의 바르관을 ‘양식 발전사적 견해’로 규정한다면, 돌스는 ‘양식 본질론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돌스에게 양식은 고전주의에서 바로크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주의와 바로크는 처음부터 완전히 본질이 다른 두 현상이다. 요컨대 바로크는 ‘역사 양식’ 아니라 ‘문화 양식’이기 때문에 역사의 모든 시대에 걸쳐 모습과 형태를 바구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제3장 앙리 포시용『형태의 삶』
피카소와 같은 해인 1881년 프랑스 브로고뉴 지방의 디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 지방에서 꽤 알려진 판화가로 포시용은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판화 제작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1913년 리용대학 문학부 교수로 있다가 1925년 소르본 대학으로 옮기고, 1938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미술사 강의를 맡게 된다. 2차대전 발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포르의 미학이 생물학과의 유사성을 강조한 나머지 고찰 대상을 미술 자체에서 문화 전반으로, 문화적인 것에서 인간활동 전반으로, 나아가서는 인간에서 자연계 전반으로 끝없이 확대해 감으로써 마침내 전 생명의 역사 속에서 조형예술만의 특성을 매몰시켜 버린데 비해, 포시용의 미학은 자연계는 물론 인간의 일반적인 문화활동과도 명확히 구별되는 창조활동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자율적인 미술사의 영역을 확립했다. 포르가 19세기적인 ‘문화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사람이었었다면, 포시용은 명백한 20세기 ‘미술사학자’였다.
“예술작품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고, 형식이면서 동시에 내용이다..... 그것은 변하기 쉬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지만 동시에 영원의 세계에 속한다. 또한 개별적이고 국지적이고 독특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증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형태에서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으려는 유혹에 빠진다. 요컨대 형태의 개념을 어떤 대상을 재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 개념과 혼동하고 나아가 기호의 개념과 혼동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기호란 다른 뭔가를 의미하며, 형태란 자기 그 자체가 의미가 된다.” - 포시용, 「형태의 생명」
포시용은 예술작품이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내용을 지닌 형태 세계라는 사실을 중시했고, 그러한 세계를 끝가지 견지했다.

제4장 에르빈 파노프스키『도상해석학 연구』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1892년 독일에서 태어나 베르린, 뮌헨,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1921년 함부르크 대학 강사로 시작해서 교수가 되었다. 이 함부르크 시절 도상해석학의 시조하고 할 바르부르크 연구소에서 공부한 것이 그의 방법론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후 나치가 대두하자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뉴욕 대학을 본거지로 삼아 활약했다.
다카시나 슈지는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에 3 chapter나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파노프스키와 도상학은 중요하다. 16세기 피렌체의 화가 프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드/애욕이 알레고리’ 그리고 Bronzino가 디자인한 tapestry 두작품 ‘억울함의 해명’과 ‘플로라’을 도상학으로 설명하는 내용 입이 딱 벌어졌다.

제5장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
제6장 파노프스키 부부『판도라의 상자』

제7장 앙드레 말로『사투르누스 - 고아론』
앙드레 말로는 고야의 화려했던 궁정생활로 대표되는 인생 전반부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던 만년의 작품만을 문제 삼는다. 고야의 인생 후반부 즉 1790년경부터 그를 엄습한 청력 상실과 궁정생활과의 결별, 사교적이고 쾌활했던 고아는 이 시기 이후 돌변해서 사람을 싫어하고 세상을 등진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세월과 더불어 화가의 생명인 시력의 위협을 느끼며 끊임없는 불안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 음침한 사투르누스의 불길한 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푸생이 그린 裸婦의 그림자에는 관조의 세계가, 렘브란트가 그린 나부의 그림자에는 영원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18세기 나부에는 능욕에 대한 은밀한 공모가 있다. 고야가 그린 ‘누드의 마하’는 전례없는 작품으로,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에 비너스’의 모작이라고 보는 것은 말도 안되는 추측이다. 확실히 벨라스케스의 나부는 여성으로 바뀐 최초의 여신이며, 그 점에서 특수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고야는 개성적인 누드를 처음 그린 것이 아니라, 에로틱하지만 관능적이지 않은 나부를 처음으로 그린 것이다.

제8장 앙드레 말로『상상 미술관』
다카시나 슈지는 1974년 일본을 방문한 앙드레 말로와 만나서 겪은 일화를 이렇게 소개하면서 말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말로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학자라기 보다는 밀림 속에서 유적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행동가’ 말로가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 세계 각지의 무수한 예술품 복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는 정적인 모습은 탐험대원과 도서관의 문헌학자 사이의 거리 못지 않게 그의 예술관의 진폭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상상미술관’의 발상은 바로 그러한 말로의 폭넓은 예술관에서 비롯한 필연적 결과였다.

제9장 한스 제들마이어「브뢰겔의 '마키아'」
제10장 자크 마리탱『예술과 시에서의 창조적 직관』

제11장 케네스 클라크『풍경화론』
미술사학자로서 클라크의 지위가 확고해진 것은 윈저 궁에 보존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데생 목록을 작성한 업적 덕분이었다. 그 연구를 토대로 집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평사적인 명저다. ‘풍경화론’은 1946년 옥스퍼드 대학 슬레이드 미술사 강좌 담당교수로 부임했을 때 처음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제12장 리오넬로 벤투리『근대 화가론』

제13장 요셉 간트너『인간상의 운명』
요셉 간트너는 하인리히 뵐프린의 수제자로 뵐프린 사망 후 바젤 대학에서 스위스 뿐이나라 서구 미술사학계 중진으로 활약했다. 간트너는 ‘예술 형식으로서의 미완성’을 표상형식의 해석학적 심리학으로 ‘프레피구라치온’(先形象)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제14장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곰브리치는 오스트리아 비인 태생으로 율리우스 폰 슐로서에게 배운 비인학파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나치의 압박을 혐오하여 영국으로 건너갔고, 옥스퍼드의 슬레이드 미술학교 교수와 유니버시키 컬리지 교수를 거친 후 오랫동안 런던대학의 Warburg연구소 소장을 활동했다. 곰브리치는 예술이란 심리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예술 연구는 심리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제15장 곰브리치『예술과 환영』 다시 읽기
‘예술과 환영’은 미술의 역사를 그려진 ‘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형태’의 지각을 통해 해석하려한 기념비적인 저서이다.

제16장 르네 위그『예술과 영혼』
르네 위그는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고 심리학을 연구했다. 게다가 루브르 미술관 학예관으로 오랫동안 실제 작품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곰브리치가 실험심리학을 무기로 ‘지각의 미학’을 주장한데 반해, 위그는 심층심리학이나 언어심리학을 무기로 ‘영혼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제17장 니콜라우스 펩스너『영국 미술의 영국성』
제18장 앙드레 샤스텔『로렌초 호화왕 시대의 피렌체 예술과 휴머니즘』
제19장 기디온의 예술론, '현재에서 영원으로'

제20장 허버트리드의 예술론, '예술과 사회'
조형예술이론에서 리드의 가장 큰 공헌은 사상(idea)보다 도상(icon)이 선생한다는 사실을 역사적-철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한 점에 있다. 인간정신이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구체적 이미지를 추상적 관념이나 언어로 만들어 낸 것보다 역사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현대가 민주화/평등/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오히려 평균화/일반화/획일화 되어 특이함을 배척하고 상상력을 억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개탄

제21장 앙리 베르그송의 예술론, 가능성과 현실성
제22장 카시러의 예술론, 인간과 상징

다카시나 슈지, ‘명화를 보는 눈’ (2002:눌와)

다카시나 슈지(高階秀爾), ‘명화를 보는 눈’ (2002:눌와)

본서의 저자는 프랑스에서 서양근대미술사를 전공한 다카시나 슈지(高階秀爾) 도쿄대교수이다. 일본에서는 이와나미문고에서 69년과 71년에 2권으로 출판된 책인데, 한국에서는 2002년 12월에 이 두권을 한권으로 묶어 내용을 1,2부로 나눠서 번역 출간되었다. 저자는 각 지역과 시대별로 주목할 만한 그림 작품을 먼저 선정한 다음 그 그림을 꼼꼼히 분석한다. 거기에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문예사조와 역사적 배경, 화가 개인의 편력을 재밌게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화가에 대한 인물평을 첨부한다. 이런 형식으로 29명의 서양근현대 화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림에 관한한 문외한이다. 그런데 그림에 관심이 많은 아내가 유럽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미술관련 서적 괜찮은거 3권 정도는 보고 가세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여행다니는 중에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그림보는 시간이 곤혹일 수 있어요.”

유럽여행 선배인 아내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책을 봐야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Yes24의 독자서평을 뒤적이다 몇권을 간추렸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보면 최상이지만, 내용이 방대해서 질려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서점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최종 구입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양그림에 대해 처음 입문하는 생짜배기 초짜가 그림에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그림의 깊이를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탁월한 책이다. 이 책 한권만 읽고 간다면 유럽배낭여행 다니다 들르는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 박물관과 갤러리 곳곳에서 이 책에서 설명한 그림을 만나는 재미가 여행의 흥분을 더해줄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바로 코 앞에서 보는 흥분.... 짜릿하다. 그러나 그 그림이 어떤 배경에서 누가.. 왜..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렸는지를 모르면... 그냥 종이쪼가리에 물감 처바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면 보인다. 유럽 다니면서 박물관, 갤러리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위해서라도 이 책만은 읽고 가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신미원씨의 번역도 깔끔하고, 도판도 선명하다. 그래서 기꺼이 별 다섯개를 주는 바이다. 간만에 만난 사서 전혀 돈 아깝지 않은 책이다. 미술에 관한 책을 쓰려면 적어도 이정도는 써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를 보면 책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어 소개한다.

1.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철저한 사실주의
산드로 보티첼리 <봄>- 신화적 환상의 장식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안나와 성모자>- 천상의 미소
산치오 라파엘로 <작은 의자 위의 성모>- 완벽한 구성
알브레히트 뒤러 < 멜렝콜리아 1>- 빛과 어둠의 세계
디에고 벨라스케스 <궁정의 시녀들>- 붓놀림의 마술
렘브란트 <플로라>- 명암 속의 여신
니콜라 푸생 <사비니 여자들의 약탈>- 다이내믹한 군상
얀 베르메르 <화가의 아틀리에>- 상징적 실내 공간
앙투안 와토 <사랑의 섬으로의 순례>- 그림으로 그려진 연극 세계
프란시스코 데 고야 <벌거벗은 마하>- 꿈과 현실의 관능미
외젠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들>- 빛나는 색채
윌리엄 터너 <국회의사당의 화재>- 불과 물의 공기
귀스카브 쿠르베 <아틀리에>- 사회 속의 예술가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근대의 서곡

2. 인상파에서 순수추상까지

클로드 모네 <양산을 쓴 여자>- 빛에 대한 갈망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앞의 소녀들>- 색채의 하모니
폴 세잔 <온실 속의 세잔 부인>- 조형의 드라마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침실>- 불안한 내면 세계
폴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이국적 환상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고요한 시정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 루즈의 포스터>- 세기말의 애수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여자>- 소박파의 꿈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불안과 공포
앙리 마티스 <커다란 붉은 실내>- 단순화된 색면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큐비즘의 탄생
마르크 사걀 <나와 마을>- 회상의 예술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 제3번>- 추상회화로 가는 길
피레트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 대도시의 조형시
이태준, 無序錄, (범우사:1993년 刊)

나는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80년대 군사정권시절에 유년,청소년시절을 보냈고, 90년대 초반에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고교시절 한국단편 소설은 거의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태준의 작품은 접할 수도 없었다. 군복무중인 1993년 범우사에서 이태준의 수필 ‘무서록’이 출간되었다. 서점에 들렸다가 책제목이 눈이 띄어서 집어 들었다. ‘無序錄’ ‘서문이 없는 글’이라.... 그냥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 생각나는데로 단편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저자를 보니 상허 이태준... 월북작가라는 프로필이 눈이 띄었다. ‘음.. 그래서 YS정권 들어선 지금에서야 출판금지가 해제되었구나...’ 2000원밖에 하지 않는 문고판이라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읽어내려가다가 빠져들어갔다. ‘어라~ 이 글이 진정 일제시절 1920-30년대에 쓰여진 글이란 말이가?’ 믿겨지지 않았다. 깔끔한 문장.... 정선된 문체, 소박하지만 고급스런 어투...

마치 ABBA의 음악을 듣는 듯 했다. ABBA의 음악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음악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지금 들어도 그 편곡이나 악기사용 등이 얼마나 세련돼있는지.... 2004년 요즘 나오는 곡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있다는 느낌이 든다.

1941년에 출간된 무서록... 지금 읽어도 현대어 감각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탁월한 수필집이다. 이태준 대단한 문필가이다. 이때까지 내가 읽어본 최고의 수필을 꼽아보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태준의 ‘무서록’을 추천한다.

목회자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표현법을 체득해야 한다. 그래서 잘 쓰여진 수필이나 시를 많이 읽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내 나름대로 고급스런 문장들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내 설교 말투는 아직도 너무나 투박하고.. 쌍스럽고... 과격하다. 우리 집사람이 내 설교투를 매번 지적한다. 그래도 나는 내 말투를 바꿀 의도가 별로 없다. “나는 내방식대로 설교할꺼야”라고 아내한테 댓구할 때마다, 아내는 ‘저 똥고집’이라며 놀린다. 그리곤 ‘당신처럼 고급문장의 책을 많이보면서도 언어순화가 안되는 사람은 없을거야...’라며 포기를 한다. 여보 마누라.. 글과 말투는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의 반영이지... 부드러운 책 많이 본다고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바뀌는 건 아니올시다...! 그래도 나도 부드러운 표현을 잘 하는 설교자이고 싶다. 얼마나 더 부드러운 글고 고급스런 문체를 접해야 내 말투가 바뀔까.... 예수님 재림하시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허허~



* 2004년 이태준 고택 수연산방에 갔다가 한 컷

내 블로그를 방문해준 분들을 배려하는 심정에서 '무서록'에 실린 이태준의 수필 중 내가 좋아하는 글 한편만을 맛배기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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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品愛

어제 京城驛(경성역)에서 新村(신촌)오는 汽動車(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세떼가 되어 재깔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위 입은 적삼 등어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애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던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

“걔 재봉한 걸 잃어버렸어요”한다.

“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어버렸어요. 그래 울어요.”

큰 여학생은 이내 우는 아이의 등을 흔들며 달랜다.

“얘 울문 뭘 허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걸 우는 건 바보야.”

이 달래는 소리는 기동차 달아나는 소리에도 퍽 맑게 들이어, 나는 그 맑은 소리의 주인공을 다시 한번 돌려 보았다. 중학생은 아니게 큰 처녀다. 분이 피어 그런지 흰 이마와 서늘한 눈은 기동차의 유리창들 보다도 신선한 처녀다. 나는 이내 굴속으로 들어온 기동차의 천장을 쳐다보면서 그가 우는 소녀에게 한 말을 생각해보았다.

“애 울문 뭘 허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걸 우는 건 바보야.”

이치는 맞는 말이다. 울기만 하는 것으로 찾아질 리 없고, 또 울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우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음에 있어 곧잘 어리석어진다. 더욱 이 말이 여자로도 눈물에 제일 빠른 처녀로 한 말임에 생각할 재미도 있다. 그 희망에 찬 처녀를 저주해서가 아니라 그도 이제부터 교복을 벗고 한번 人間制服(인간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날, 감정 때문에, 혹은 이해 상관으로 ‘울어도 안 될 것’을 울어야할 일이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신촌역을 내려서도 이 ‘울문 뭘 하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소리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나 그 말이나 이 말의 주인공은 점점 내 마음속에서 멀어가는 대신 점점 가까이 떠오르는 것은 그 재봉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소녀이다. 그는 오늘도 울고 있을 것 같고 또 언제든지 그 잃어버린 조그마한 자기 작품이 생각날 때마다 서러울 것이다. 등어리를 조각조각 기워 입은 것을 보아 색헝겊 한 오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께 조르고 동무에게 얻고 해서 무엇인지 모르나 구석을 찾아 앉아 동생 보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들어가며 정성껏, 솜씨껏, 마르고, 호고, 감치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 동무의 것을 제쳐놓고 선생님의 칭찬을 차지하게 될 때, 소녀는 세상일에 그처럼 가슴이 뛰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하학(하교-서목사 註)만 하면 어서 가지고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도, 좋은 끗수 받은 것을 자랑하며 보여드리려던 것이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

소녀에게 있어선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요 작은 슬픔이 아닐 것이다. 나도 작품을 더러 잃어보았다. 稻香(도향-여기서 도향은 나도향을 말한다-서목사 註)의 죽은 이듬핸가 曙海(서해-함북 성진 출신의 ‘탈출기’로 유명한 소설가-서목사 註)형이 <현대평론>에 도향 추도호를 낸다고 추도문을 쓰라 하였다. 원고청이 별로 없던 때라 감격하여 여름 단열밤을 새어 썼다. 고치고 고치고 열 번도 더 고쳐 현대평론사로 보냈더니 서해형이 받기는 받았는데 잃어버렸으니 다시 쓰라는 것이다. 같은 글을 다시 쓸 정열이 나지 않았다. 마지못해 다시 쓰기는 썼지만 아무래도 처음에 썼던 것만 못한 것 같아 찜찜한 것을 참고 보냈다.

신문, 잡지에 났던 것도 미처 떼어두지 않아서, 또 떼어뒀던 것도 어찌어찌해 없어진다. 누가 와 어느 글을 재미있게 읽었노라 감상을 말하면, 그가 돌아간 뒤에 나도 그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 찾아본다. 찾아보다 찾아내지 못한 것이 이미 서너 가지 된다. 다시 그 신문, 잡지를 찾아가 오려 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꽤 섭섭하게 그 날 밤을 자곤 하였다. 이 ‘섭섭’을 꽤 심각하게 당한 것은 장편 <聖母(성모)>다. 그 소설의 주인공 순모가 아이를 낳아서부터, 어머니로서의 애쓰는 것은 나도 상당히 애를 쓰며 썼다. 책으로는 못 나오나 스크랩채로라도 내 자리 옆에 두고 싶은 애정이 새삼스럽게 끓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위에 기동차의 소녀처럼 울지는 않았다. 왜 울지 않았는가? 아니 왜 울지 못하였는가? 그 작품들에게 울 만치 애착, 혹은 충실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리면 울지 않고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써야 옳을 것이다.

개빈 벡커, '범죄신호', 황금가지

Gavin de Becker, The Gift of Fear:survival signals that protect us from violence, 황금가지

작년에 서점에 들렸다가 특이한 제목의 책을 한권 발견했다. ‘범!죄!신!호!’라는 책 제목에 -모든 범죄에서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법- (The Gift of Fear : survivals signals that protect us from violence)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목차를 살펴보는데 구미가 당겼다. 당장 구입해서 그 주에 다 읽었다. 목차를 한번 살펴보면 책 내용을 거의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 위험 : 당신은 이미 당신에게 오는 위험을 알고 있다
2. 직관 : 아니요, 그때도 당신은 알았을 거예요
3. 예측 : 당신이 풀어내지 못할 인간 행동의 비밀은 없다
4. 생존 신호 : 당신 직관에 귀를 기울여라
5. 낯선 사람 : 당신은 이미 정확한 답을 알고 있다
6. 질문 : 질문을 아는 것이 그 답을 아는 첫걸음이다
7. 약속 : 문제는 위협이 아니라 맥락이다
8. 집착 : 반응을 얻는 데 집착하는 가해자와 괴롭힘을 멈추는 데 집착하는 피해자
9. 의심 : 의심은 직관의 신호이다
10. 동침 : 폭력 환경에 머무리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다
11. 다른 언어 : 남성은 누군가를 쫓아다닐 때 친절하고 여성은 거절할 때 친절하다
12. 어린 시절 :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다
13. 암살범 : 세계는 우리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14. 추적 : 누군가 당신은 스토킹하고 있다
15. 공포 : 생존의 가장 큰 적은 공포이다.

본서의 주제는 '범죄가 저질러지려고 하는 상황을 사람이 직관적으로 인식하여 대처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먼저 저자를 살펴보자. Gavin de Becker는 유년시절이 암울했다. 그는 가정폭력과 수많은 위험한 순간을 일상사로 접하면서 살아왔다. 그는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일정한 행동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암울한 유년시절을 격은 아이들은 커서 범죄자가 된다. 그러나 Becker는 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활용하게 된다. 실제 미국에서 유명인사와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보안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는 수많은 사례를 언급하면서 본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내용을 설명하면서 사회병리학,심리학,범죄학,내적치유,아동폭력,유아학대 등의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범인들이 계획적으로 또는 돌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려고 할 때, 그들의 말과 행동, 눈빛에서 벌써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다. 이 이상 증상을 저자는 아주 꼼꼼하게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책의 원제목은 'The Gift of Fear'이다. 의미를 풀어보자면 '두려움(공포)는 인간이 위험을 직감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은사)로 준 본능'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위험을 인식하는 요인들을 살펴볼 것과 함께 ‘뭔가 이상하다...’는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기 말기를 권한다. 그러나 근거도 없는 쓸데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걱정하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목회를 하다보면 나 또한 사람들의 행동과 말투, 눈빛, 자그마한 몸짓 하나...글씨, 많이 쓰는 표현... 등을 본능적으로 유심히 살펴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분석이 된다. 한 인물에 대한 유형분석이 어느정도 끝나면 그 사람의 행동패턴을 예측해본다. “이 상황에서... 제는 이렇게 반응하고 이런 결정을 내릴거야....”라고 예상한다. 거의 대부분 내 예측은 맞아 떨어진다. 사람의 행동유형분석이 가능하면 그 사람을 그만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된다. 본서는 목회차원에서도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직감이라고 언급하지만 내가 보기엔 영감의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라.. 우리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 때, ‘뭔가 이상하다’는 영감을 느끼게 된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영감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다.

사람은 역사를 가진 존재이다. 과거의 흔적을 이해할 때 현재의 모습이 이해되며, 미래의 모습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석만으로는 안된다.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어떻게 도와야 될지.. 문제의 실체가 뭔지... 영감으로 깨달아질 때가 종종있다. 이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거다. 구태여 Inner Voice니 뭐니하는 따위의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성령에 민감한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다.

나는 냉철한 이성의 분석력과 풍부한 영감의 분별력을 가진 목회자 이고 싶다.

Linked - the new science of networks, 동아시아

A.L. 바라바시, '링크' (동아시아:2002)

세상과 기업환경(경제주체간의 연결고리), 인간관계의 그물망(인맥), 심지어 자연계 세포간의 신경전달 경로 network 등...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척도없는 네트웍구조'(free scale network)는 창조주 하나님이 design하고 사람이 만들어가는 모든 환경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시각(Paradigm)이다.

20세기가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나뭇가지 구조'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거미줄 구조(web)'로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19세기 이후의 모든 조사연구방법이 모든 것을 미세하게 조각내서 그 요소를 분석하는 '환원주의'였다. 각 요소의 기능을 파악하는데는 성공적이었으나, 총체적으로 보는 시각을 잃어버렸다. Network이라는 paradigm으로 보면, 모든 인간/자연 현상들이 유기체로 서로 연결되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network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파편뿐만 아니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은 바라볼 때는 현미경과 망원경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서는 세상을 이해하는 신선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수학(집합론과 기하학, 지수,로그함수,멱함수)에서 시작해서 Computer science, 경제, 생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다 느끼는 재미가 솔솔찮다. 개인적으로 복음의 전파경로와 공동체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Network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면서 읽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멱함수법칙은 액체가 열을 받아서 기체로 바뀔 때에도 적용되고, 납조각이 충분히 냉각되어 초전도체로 바뀔 때에도 작용한다.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전이과정은 놀라울만큼의 수학적 일관성을 보여준다. Network을 이해하는데도 멱급수라는 수학함수로 설명이 된다.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조직화되고 인간관계의 network이 형성되어 공동체가 출범하고 결국 무질서한 듯하나 일정한 질서대로 부흥이 임하여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network을 이해하고 있으면 전략적으로 에너지를 집중하여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linker가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고 목회에 있어서도 극도의 효과/효율적인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과학서적이지만 세상과 교회와 목회를 바라보는 내 시각을 한번 뒤집어 엎은 책이다. 읽어본 사람만이 이 책의 진면목을 알게될 것이다. 2003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라 추천한다.

Bevin Alexander,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Bevin Alexander,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히틀러의 전쟁 마지막 1000일의 기록」홍익출판사

먼저 2차대전을 분석하는 저자 Bevin Alexander의 접근방법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구입했다. 대부분의 2차대전 관련서적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연합군이 어떻게 독일군을 물리쳤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베빈 알렉산더는 반대의 입장이다. 왜 히틀러가 실패했는가를 그 몰락과정과 실패요인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저자가 미국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과 엉뚱한 선택을 한 정황을 설명할 때마다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마치 히틀러가 승리하기라도 바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시각이 본서의 묘미이다.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었다. "2차대전은 연합군이 잘 해서 이긴 전쟁이 아니라, 히틀러가 막판에 너무 많은 어이없는 결정을 내려서 진 전쟁이구나..." 이미 지나간 과거 역사에 가정을 해보는 짓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참모들의 조언에 귀기울이고 막판에 실수하지 않고, 자충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어떤 새로운 결과가 주어졋을까를 상상하는 재미가 솔솔찮다. 2차대전 관련 입문서로 본서를 추천한다.

Erick Durshmied,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세종서적

인간 역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열악한 시기는 전쟁을 치르는 시기다. 인간 본성의 바닥이 드러나며, 인간실존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전투현장이다. 평상시의 리더십보다 전쟁에서 발휘되는 리더십은 더 극적이고 더 뛰어나다. 영웅은 亂世에 등장한다. 어려운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이다. 전쟁의 지휘관이 누군가? 또 전투현장의 야전사령관이 누군가에 따라 전쟁의 진행양상은 완전히 판이하게 전개된다. 전쟁이 벌어지는 전투현장에서 벌어진 사건과 기록들에서 배울 수 있는 꺼리들은 무궁무진하다. 리더십,상황판단력,역사인식,조정능력,심리파악,지형물이용,명분의 축적... 이 모든 인간세상의 다양한 측면들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전투현장이다. 개인적으로 최근 전쟁관련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목회자는 좀 더 차분하고 명상에 도움이 되며, 사랑이 풍부한 서적들을 읽어야 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왠지 처절한 삶의 투쟁현장에 관한 보고와 기록에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감동을 느낀다.



Erick Durshmied,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저자 Erick Durshmied는 오스트리아출신의 종군기자이다. 2차대전 기간에 유년시절 보낸 저자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전쟁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환경에서 성장했다. 전쟁은 결국 현장전투지휘관과 국가최고지도자의 Leadership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 역사상 전쟁의 흐름을 돌려놓은 10개의 전투를 선정한 후, 종군기자답게 수많은 현장경험자들과 장군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현지답사를 통한 철저한 조사을 통해

Hinge Factor(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요인)

를 분석하고 있다.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고,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지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결국 전쟁의 흐름을 돌려놓는 돌발변수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종속변수이고, 최종적인 전쟁의 승패 결정 요인은 Leadership들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적절한 명령(결정), 그리고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있는 현장전투지휘관이 독립변수라고 주장한다. 전투를 치르면서 너무나도 어이없는 결정과 명령으로 전쟁에서 지게되는 10개의 study Case를 통해 배울점이 많다.

2016년 6월 16일 목요일

한스 큉, '카톨릭교회(The Catholic Church)', 을유문화사:2003


한스 큉, '카톨릭교회(The Catholic Church)', 을유문화사:2003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Was ist Kirche?)', 분도출판사:1978
한스 큉, '그리스도교:본질과 역사(Christianity:Essence, History and Future)', 분도출판사:2002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도와주는 대표적인 책이 한스 큉의 책이다.

먼저 한스 큉이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의 수르세의 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 줄곧 가톨릭 도시인 루체른에서 초중등 교육을 마치고 로마로 유학, 교황청 부설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1954년 27세 때 가톨릭 사제로 서품받았다.
이후 파리의 소르본과 가톨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의 가톨릭 신학교수가 되었다. 1962년 가톨릭 교리와 신앙 실천의 주요 영역들을 혁신적으로 근대화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자문위원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1979년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 파문을 일으켜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이 일은 엄청난 국제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20년 동안 '가톨릭 신학교수'가 아닌, 개인적인 '교회일치 신학교수'로서 튀빙겐대학에 계속 재직했고, 오늘날까지도 '비판적 충성심'을 유지하며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신부로서 생활하고 있다.

한스 큉의 저서 중에 가장 먼저 접한 책이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3,500원 짜리 책이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신대원 다니던 시절 동아리멤버들과 함께 발제를 했던 책이다. '교회란 무엇인가(Was ist Kirche?)'라는 본서는 원래 'Die Kirche(교회)'라는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방대한 저서의 요약본이다. 저자의 교회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요약본이라 하더라도 그 저술 의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현대교회의 흐름과 사상적 배경, 교회가 출범하게된 초대교회 상황,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 신약성경에 드러나 교회의 역사적 본질,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과 교회, 현재 교회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특성(단일성,보편성,성성,사도성)을 고찰하고... 교회의 본질적 역할과 교회일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방대한 저서의 요약본이라 내용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내가 이해한 내용을 주석으로 달면서 보았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제기한 책으로서 이만한 책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 2003년에 을유문화사에서 크로노스총서 시리즈로 한스 큉의 '카톨릭교회'를 출간하였다. 한스 큉이 일반 대중들을 위해 쓴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장 구입했다. 겉으로 보면 '카톨릭교회 비판'서라고 파악되는데.. 막상 읽어보면 카톨릭교회에서 파문당한 신부의 카톨릭교회에 대한 구구절절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엉뚱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버린 카톨릭교회사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외롭게 투쟁하는 한스 큉의 마음이 드러난다. 카톨릭교회는 그를 버렸지만, 그는 카톨릭교회를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은 이미 분도에서 출간된 '기독교:그 본질과 역사 그리고 미래'라는 107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저술의 요약판이다. 분도책은 내용이 방대하고 심도 깊은 분석이 꼼꼼하게 실려있다. 대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질리도록 만든다. 일반 신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한스 큉은 이 딜레마를 '카톨릭교회'라는 200페이지 짜리 도서로 현학적은 부분은 걷어내고, 교회사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만을 갖추려서 핵심만 설명하고 있다. 책 제목만 보고 카톨릭교회에 대한 설명서라고 예단하지 말라. 개신교와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를 아우르는 2000년 교회사를 꿰뚫는 놀라운 책이다.
제목을 보고 로마카톨릭교회만을 다룬 책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2000년 전체 교회사의 흐름에서 반드시 파악해야할 핵심만을 독특한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는 책이었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리,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분석하고 있다. 본서에는 교회사를 풀이하면서 로마카톨릭과 교황청의 오류, 잘못된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에 카톨릭교회에 대한 애정이 구구절절이 배어있다. 그는 교황청에서 파문당한 신부이지만, 스스로 카톨릭 사제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카톨릭 내부에 이런 양심적인 신학자/사제/신부들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로마카톨릭교회를 이단이나 적그리스도교라고 속단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되면 '기독교(본질과 역사)'라는 책을 다시 한번 숙독해보려고 한다.
참 그리고... 번역서를 읽다보면 짜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배국원 침신대원 교수가 번역을 아주 깔끔하게 해냈다.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Waldron Scott, 'Bring for Justice', 두란노:1997

월드런 스콧,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를 향한 제자도, 두란노:1997

<Summary:요약>

먼저 책 내용을 요약해보자....

대부분의 선교관련 서적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서문에서는 이 책을 쓰게된 저자의 동기를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주제를 삼각관계로 제시하고 그 역동적 상호관계를 밝히고자하는 시도로 이 책을 쓴다고 했다. 저자가 말하는 세 가지 주제는 제자도, 정의, 선교이다. 1장에서는 사도시대 이후 복음이 괄목할만한 확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은 아직 그 과제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시대부터 현재까지 전도활동이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그 제약을 육제적(신분적), 재정적, 문화적(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 영적인 부분(사탄의 반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조용히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극복해가며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은 양과 질의 면에서 괄목할 만하며 영혼구원에 뿐만 아니라 계몽, 교육, 사회정의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또 이루어저야 만 한다. 2장에서는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서구 개신교 200년 선교활동을 제국주의적 선교의 '과실'과 개화의 '공로'의 공과로 설명하는 J.Herbert Kane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저자는 선교의 실제적 장애물에는 세계적인 Inflation, 위화감을 조성하는 기독교인의 생활양식, 자민족 중심적인 문화이해로 유발된 신학의 억지적용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선교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또 수직/수평적 이분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전략들의 개발로 낙관적이라고 말한다. 서문과 1,2장이 본서의 서론이었다면, 3장∼6장은 선교의 성서적 기초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3,4장은 구약에 나타난 선교를, 5,장은 신약에 나타난 선교를 살펴보고 있다. 그 후 7장에서는 '고통 당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전세계적 관점에서 본 선교를 말하면서 전세계적 불의와 부의 편중, 빈곤의 원인, 다국적기업의 패해를 지적하고 있다. 이어 8장에서는 개인적인 악과 이런 악의 총체인 구조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성경에서 찾고 있다. 또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더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선교는 정의의 구현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9장에서는 대위임령의 실체는 '제자삼는 일'에 있다고 보고, 성경적인 제자도의 표준을 순종,사랑,열매맺음이라고 파악한다. 10장에서는 이런 제자삼는 일은 결국 재생산을 가져와 기하급수적 교회성장을 초래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11장에서는 이런 복음전도의 참된 목적인 제자도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이어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까지 주장한다. 또 제자삼기를 겨냥하는 복음의 초청은 살아 계신 주님과 연합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는 요청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복음을 받은 자는 사회적인 명령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 제자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12장에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제자도, 사회정의, 선교를 주제로, LeRoy Eims의 '성장하는 제자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제자도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 삶의 실제적 변화와 이웃을 향한 적극적 행동까지 나아가는 개념으로 제자도를 설명한다. 또 12장에서는 선교를 위한 실제적 준비를 Arthur Glasser의 개념을 빌어 영적인 성숙, 공동체의 경험, (영적)은사의 발견, 문화적 인식(타문화권에 대한 준비)의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타문화에 대한 인식을 위해 실제적 타문화 체험의 필요서을 강조하면서 여러 프로그램(EFICOR,HNGR)를 실례로 들고 있다. 마지막 13장에서는 말씀을 행하기 위한 세가지 행동유형을 개인적,공동체적,국가적/국제적 활동으로 나누어 각각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 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과정을 성경공부를 통해 확신을 가지고 헌신을 결의하며 원주민과 자신을 동일시함을 통해 실제적 참여를 한다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세계 기아문제에 대한 교회공동체와 국가적 차원의 대응방법을 단계적으로 모색함으로 그 실제적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있다. 결론부분에서는 선교를 한답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 하면서 항상 우리 자신을 살펴볼 것을 권고하고 있다.

<Evaluation:평가>

우선 저자의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동기형성과정을 한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저자의 성장 배경을 살펴봄으로 저자가 왜 선교에 있어서 제자도와 사회정의실현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Wardron Scott은 Navigators선교회 출신이다. 이 선교단체는 '제자도 훈련'에 대한 강조, 새신자들을 기술적으로 양육하는데 대한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립자 도슨 트로트먼이 주장한 세계선교를 향한 'World Vision'으로 유명한 국제선교단체이다. 저자는 Navigators선교회에서 신앙이 성장하면서 수직적 차원에서의 선교를 상당히 강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이런 관점을 가지고 20년 동안 세계 여러 사역지를 다니면서 선교사역을 감당 하게되었다. 그러던 중 WEF(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제 6차 연합총회에 Navigators선교회 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1975년 1월부터 WEF총재직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저자는 수년동안 여러 복음주의 단체와 연합사역을 하면서 한 지역에 국한된 시각이 아닌 그야말로 선교를 세계적 시각으로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특히 서구와 제3세계, 양쪽에서 복음주의 공동체들과 교류하면서 Navigators선교회 출신의 저자가 가진 선교적 관점이 심각하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한 복음과 구원에 관한 내세신앙을 전달해주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것이 선교사역의 전부인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WEF총재가 되어서 여러 다른 선교단체의 사역들을 조율해야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각 선교단체가 추구하는 선교사역 방법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고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제3세계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 원주민들과 서구 선교사들간의 사고의 gap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또 선교현지의 필요를 바라보면서, 선교현장에서 종국적인 선교의 완성은 도대체 어떤 형태인가를 고민하면서 Church planting이 선교의 완성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까지가 선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먼저 깨닫은 저자는 수직적 차원만 강조하는 Navigators의 한계를 스스로 폭넓은 조망(perspective)을 통해 극복한 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최종적으로 다시 언급하기를 선교현장에서 사회정의구현도 필요하지만 선교의 본질상 복음전파와 영혼구원,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추구, 교회개척 등이 사회정의에 우선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는 제자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회정의실현까지 선교의 영역에 포함한 것은 일단 선교현장의 실제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선교를 단순한 복음전도로만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인 公義에 부합하도록 인간사회가 정의로와 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선교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또 저자는 이런 사회정의의 실현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文化優越主義에 빠져 自文化中心的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원주민들의 의견을 도외시한 채 선교사역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 시각적 교정을 출발하고자 한다. 이는 이 때까지 역사상 항상 문명의 우월성을 구가해왔던 서구사람들의 교만한 사고가 여실히 드러난 일면이라 하겠다. 서양사람들은 항상 가르치려고 하는 입장이었기에 배우려고 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선교사도 이에 예외는 아니다. 선교사들조차 선교지의 주민들을 미개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원주민 회심자들을 나중에 함께 일할 동역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끝까지 관리 감독을 해야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서구 선교사들의 교만은 결국 피선교지의 주민들이 스스로 교회를 운영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저자가 선교현지의 경험을 통해 서구선교사들의 문화우월적 시각이 비성경적이라는 지적은 상당히 예리하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지적은 많았으나, 저자의 지적은 현지경험을 통해서 세계 각지를 발로 뛰면서 얻은 결론이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 중 7장을 살펴보다보면 너무 한쪽 시각만을 고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7장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본 선교:고통당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에서 제3세계와 서구 선진국의 부를 비교하면서 부가 서구제국으로 너무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가난한 자의 편을 들고 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권력과 돈, 성에 억눌린 사람들 즉 부당하게 피해보는 약자편에 서셨다는 것이지, 단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 편에 서신 것이 아니다. 저자의 이런 관점은 다분히 이원론적이며, 천편일률적인 흑백논리요, 중용이 없는 이분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실존에서는 부요하지만 선하고 정의로운 자와, 가난하지만 악한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가난한 자가 항상 모든 부한자들에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것 만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物神主義(Mammonisim)에 빠진 부요한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富의 遍在현상인 貧益貧 富益富현상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난한 자들이 심령이 가난하여 주님을 의뢰하며, 부요한 자들은 마음이 강팍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요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자의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이라는 단순히 일방적인 이분적 도식은 조금 위험하다 하겠다.

<Application:응용>

2장에서 저자는 이 때까지 선교선교에 있어서 자문화중심적 문화제국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경계하고 있다. 선교 2세대 국가인 한국은 서구 선교사들의 잘못된 자문화중심적 문화제국주의적 태도의 폐해를 실제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自傳,自給,自治의 뇌비우스 선교정책이라는 놀라운 유산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나쁜 인습과 좋은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우월주의에 빠져 기독교를 전하기보다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기독교를 서구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피선교지 주민들에게 서구문화를 기독교인 양 전달한 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불과 100여년 전에 처했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입장을 바꾸어 놓고 피선교인의 입장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방법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상황화를 빌미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9,10,11장의 제자도에 대한 내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의 선교개념은 개인적 제자도로 출발해 개인의 제자도가 공적인 제자도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하면 결국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하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세계선교가 완성될 것이라는 개념이다. 제자도는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일 뿐만 아니라, 세상속의 제자도이다. 저자의 확장된 제자도 개념을 받아들여 제자훈련을 시킬 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구조적인 악으로 똘똘 뭉혀진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세상은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항상 위협을 받게 돼있다. 우리는 내세만을 강조하면서 사회와 국가를 도외시하는 속좁은 제자도를 버리고 진취적인 성경적 제자도를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12장 '제자도, 사회정의 그리고 선교:새로운 세계를 향하여'에서 저자가 주장한 구체적인 선교를 위한 준비에서 타문화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위해 실제적 참여의 예로 EFICOR이나 HNGR의 형태를 제안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사실 선교헌신자들이 너무 준비없이 선교현장에 투입된 것이 사실이다. 선교학과 문화인류학 등등의 학문적 연구와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학문만을 선교준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측면과 장기사역을 하지 전에 사역지를 단기(적어도 2-3년)로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과정동안은 사역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역지 분위기 파악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타문화를 인식함으로 장기사역시 문화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단기적인 현장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현장중심주의는 엎어놓고 무조건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준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다만 선교사로서의 준비가 너무 일반적이고 이론적이고 학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현장중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Integration:책 읽으면서 든 생각>

1.개인복음과 사회복음의 상호보완적 공존

교회사를 볼 때 하나님 나라 확장을 빌미로 항상 방법론이 문제였다. 하나님의 공의 따라 정의를 실천하자는 행동파가 있었던 반면, 주님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소심파가 있었다. 문제는 행동파는 소심파의 자아몰입적 신앙을 개인적이자 이기적 신앙으로 치부하면서 비판하였고, 소심파는 행동파를 복음의 역할인 영혼구원을 간과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7,80년대 상황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장로회를 위시한 여러 교단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사회정의를 실천한다는 명분하에 목사와 성도들이 거리로 뛰어 나갔다. 반정부 투쟁을 하고 물리력에 의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정의 실현에 치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영혼구원과 전도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이다. 이에 반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단들은 항상 현실안주,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상유지를 원했다.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면 조찬기도회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사회야 어찌되든 말든 예수 믿고 천당가자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기 바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무리들을 그들의 명분이나 목적보다는 방법의 그릇됨을 부각시키며 잘못된 형태의 신앙 소유자들로 매도하였다. 이런 소인배적 신앙으로는 역대하 7장 14절의 하나님, 즉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회의 불의와 악을 목숨걸고 비판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또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이런 속좁은 신앙은 복음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사전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두가지 시각은 공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실련을 설립하고 복음주의의 사회정의실현에 압장섰던 서경석 목사님이 경실련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목회사역으로 돌아가면서 한 그의 고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운동(Movement)로 바뀌지 않더군요. 개인적 회심없이는 하나님의 공의 실현은 요원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또 소심했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80년대와 90년대의 기독교의 사회참여의 긍정적 영향을 재평가하며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얼마나 바람직한 현상인지 모르겠다. 복음은 개인회심에 근거한 제자도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으로 까지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세계선교를 추구한다.

2.복음과 빵이 같이 들어가야 한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선교는 빵과 복음이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의 초기 형태는 대체로 의료선교나, 교육사업, 산업화 기술전달, 기아문제 해결 등등의 사회사업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전도를 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선교를 한답시고, 복음제시를통한 영혼구원은 접어 둔 채로, 얼마나 많은 선교단체들이 선교사업에서 선교는 없고, 사업만 남아 직접적인 영혼구원 없는 일로 바빠하는가? 물론 선교지 원주민들과의 contact point를 만드는 측면에서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공장도 세우고 그들의 육체적 물질적 필요를 채워줘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준다는 명목하에 일에만 치이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러나 본인이 96년 중국 내륙(四川, 雲南省)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해 보면, 선교현장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것 못지 않게 사회사업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물자와 식료품이 모자라서 기아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복음은 배부른 자들의 지적 유희로 치부되고 있었다. 물론 그들중에도 복음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원주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생명유지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자체가 힘든 그들에게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없이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너무 도외시한 의욕이 아닐까? 또 기본적 의료해택을 받지 못해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도 의료행위과 복음제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문맹율이 높아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제자도를 가르치기는커녕 초보적인 성경공부를 배우기도 힘든 그들에게 복음전파와 함께 교육사업을 실시하여 글을 깨우쳐주며 양육을 하는 것이 휠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교육사업은 단기적으로는 제자로 양육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수준을 높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또 의료선교는 그들의 육신적 필요를 채워줌과 동시에 영적인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기에 아주 용이하다. 대부분의 경우 육신에 질병을 가진 자들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농촌개량사업이라든지 그들의 생계 해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함으로 희망이 없는 그들에게 삶에 대한 소망을 심어줄 수 있다. 그들은 내세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현세에 대한 희망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복음은 그들의 육신적,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면서 동시에 전파되는 것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성경적인 것 같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러했기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병 고쳐주고, 헐벗은 자를 먹이고, 귀신 쫓아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지탄받는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주는데 사용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전파없는 선교사업도 문제지만 사업없는 복음제시는 그들에게 공허한 메아리로 다가갈 뿐이다. 그러므로 빵과 복음은 동시에 들어가야 한다. 노파심에서 다시 언급한다. 이 둘이 동시에 들어가야 하지만, 빵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정(process)임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단도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