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7일 목요일

박일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믿음사

박일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믿음사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 한양대 김광규교수(시인) 번역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의 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소설 제목을 따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작가 박일문은 소설 첫페이지에 이 시를 실어놓았다. 그리고 박일문은 소설 첫장 서문에서 ‘우리 시대 5.18세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헌정사를 써놓았다. 이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비해 끝까지 투쟁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얍삽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죄책감과 회한이 묻어있는 고백록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살아남은 자는 죽어간 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슬픔에 젖어있다는 의미일게다.
나는 문학가도 아니고 독일어 전공자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어를 잠시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김광규교수의 번역에선 뭔가 아쉬운 왜곡(?)이 느껴져서 나 맘대로 브레히트의 시를 원문 대조 직역해본다.
ICH, DER ÜBERLEBENDE - Bertolt Brecht
Ich, weiß natürlich :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제목: ‘나, 그 살아남은 자’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는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그 많은 친구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건 순전히 운이었음을
그러나 오늘밤 꿈에
나는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쑥덕거리는 것을 들었다. “쎈놈(?)이 살아남지...”
그러곤 나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

Bertolt Brecht


김광규교수는 원문에 없는 ‘슬픔’을 제목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 문장 ‘내 자신이 미워졌다.’는 뜻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미안함에 묻어있는 독백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원문을 다시 보자. 話者가 살아남은 이유는 투쟁에서 비겁하게 비켜났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이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적자생존’의 논리에 부합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자’(쎈 놈)이기 때문도 아니라고 호소하고 있다. 단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초두에 밝히고 있다. 그런데 죽은 친구들이 꿈에 나타나 ‘그래... 니같이 쎈 놈(?)이니까 살아남았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을 때, 자신이 하지도 않은 비겁한 짓 때문에 미안한 것이 아니라 운 좋게 살아남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욕먹는 상황이 짜증이 나서 ‘살아남은 내 자신이 싫어진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이나 성경이나 해석을 잘해야 한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근거로 문헌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살펴봐야 된다. 본문으로 하여금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의 첫 번째 원리이다. 이 시를 쓴 Bertolt Brecht는 의대 다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위생병으로 복무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전쟁 후 피폐한 독일 군중심리를 등에 업고 나찌가 정권을 잡자 이에 반발하여 반나찌/반파쇼 활동을 하게된다. 브레히트는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많이 썼던터라 나찌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미국에선 매카시즘이 덮친다. 이에 버티지 못하고 동독으로 옮겨간다. 이런 브레히트의 삶을 고찰해보았을 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해석될 수 없는 시다. 브레히트는 나찌 정권에 대항해서 할만큼 했다. 그런데 살아남아 문학작품을 쓰고,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향해 나찌나 그 부역자들이 먹어야할 ‘강한 자’(쎈 놈)라는 욕을 해대니 그 상황에 대해 짜증이 난 것이다.
아무튼 김광규교수의 번역이 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잘 표현한 시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식자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박일문은 브레히트의 시와 김광규교수의 번역을 모티브로 소설을 쓴다. 사고의 혼란을 겪고 있는 ‘나’, 나를 돕기 위해 순진한 ‘라라’는 운동권에 뛰어들어 노동현장에 투신한다. 그러나 그 내적 갈등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또다른 여친 ‘디디’는 황진이 같은 인물인데, ‘나’로 하여금 과거를 반추해보고 글을 쓰도록 권면한다. 그 결과물로 1인칭 화법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소설이 탄생한다.
소설이 92년에 출간되었는데, 16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생활을 한 나로서는 당시 시대상황이 그대로 배어있는 작품이라 책을 펼치면서 금방 공감이 되었다. 특히 소설의 배경 대학 캠퍼스를 묘사하는 장면은 너무나 낯익은 설명이라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박일문은 영남대 법학과 출신이었다. 그러니 내 청소년기에 드나들던 고향집 옆 영남대 캠퍼스 묘사에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 80-90년대를 통과한 대학생들의 문화와 삶이 잘 묘사되어 있는 소설이라 그 시대를 살아간 386세대에게는 자기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에 엄청 팔렸다. 93년 KBS에서 이병헌,신윤정,나현희 주연의 주말연속극으로 만들어 방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저자, 곱상하게 생긴 박일문(실명은 박인수)은 99년 술취한 여대생에게 결혼을 빙자로 성폭행을 했다가 구속수감된다. 문인들이 그가 저지른 명백한 사실을 알고도 탄원서를 제출했다는데..... 씁쓸함이 남는다. 설교처럼 사는 목회자,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자신의 소설처럼 사는 문학가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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