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60년 연평도 출생, 9살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서 모친이 고생스래 생계를 이어가는 집안에서 자랐다. 15살 때 셋째누나가 사고로 죽는다. 연세대 정외과 졸업 전에 이미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 이후 정치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계속 詩를 발표, 스물아홉이던 1989년 종로2가 컴컴한 파고다극장 안에서 새벽 3시경에 사망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잡다한 소문이 무성하다. 서른이 체 안되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기형도가 겪은 인생의 무게와 팍팍함이 시에도 고스란히 베어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시의 내용들이 그리 존경스럽지도 동경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다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던 동년배 젊은이들에게 절망이라는 소재로 쓰여진 기형도의 시는 현실적인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해서 유행이 되었다. 기형도의 시 두편을 옮겨본다.
<홀린 사람>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 분의 슬픔이었고
이 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 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 때 누군가 그 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 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 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 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덜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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