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2일 화요일

이나모리 가즈오, ‘CEO to CEO', 한국경제신문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설립자

서양을 이해하려면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을 연구하지 않고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동양의 산업화라는 흐름에 언제나 첨병역할을 감당했다. 미국 경영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결국 일본식 경영의 장단점을 파악하는게 첫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식 경영을 알기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세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존경받는 3대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혼다 소 이치로(本田宗一郎), 그리고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다. 마쓰시다 고노스케를 제일 먼저 알게되어 관련서적을 탐독했다. 다음이 혼다 소 이치로인데, 혼다는 사업가 중에 奇人으로 치부되는데 관련 서적이 한국에 거의 출판된게 없다. 그리고 혼다는 책을 쓰지도 않는다. 일단 그래서 나는 혼다는 뒤로 미뤄놓고 이나모리 가즈오로 바로 건너뛰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차대전 후 한국전쟁이라는 特需를 통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당시 일본상황에서 지인들의 도움과 투자로 일본의 古都 京都에서 교토세라믹이라는 기업을 창업했다. 이후 이 기업은 인공보석, 통신 등 다른 사업분야로 기업이확장되면서 교세라(京セラ:원래는 교토세라믹이었는데 줄여서 교세라로 지칭하게 됨)로 개명했다. 본서는 이나모리 교세라 회장의 자서전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 ‘CEO to CEO', 한국경제신문

이나모리는 대학졸업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소후공업에 취업한다. 회사가 휘청거리는 상황을 지켜보며 묵묵히 제품개발에 몰두하던 시절 그를 돕던 특수자기과의 홍일점 여직원이 있었는데 훗날 반려자가 된다. 이 여인의 이름은 아사코인데 부친은 스기나와 나가하루(본명은 우장춘)박사로 동경대 농학과 출신의 식물육종 분야 전문가였다. 이차대전후 조국 한국으로 돌아가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는데 힘을 쏟아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로 불렸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우장춘박사의 넷째 사위다.
교토세라믹 창업 후, 일은 엄청 많은데 이에 반해 회사 복지대책은 전무한 상태에서 직원들이 단체행동을 하게 된다. 이나모리는 이들을 사흘 동안 각개전투로 만나 설득하면서 ‘회사여건이 조금만 좋아지면 임금인상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내가 너를 배반한다면 나를 네 마음대로 해라. 네 손에 죽어도 좋다.’고 까지 말해서 마지막에 남은 직원이 이나모리의 손을 잡고 우는 사건도 있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날 밤을 겪으면서 ‘경영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종업원과 그 가족의 미래를 지켜주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이나모리는 ‘동지’나 ‘동료’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교세라는 일반 기업과 달리 이나모리를 중심으로 8명의 동지가 모여 각자 모을 수 있는 자금을 투자해 주주로 참여시켜 설립된 회사라서 사내 인간관계가 경영자와 종업원이라는 종적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쉽의 횡적 관계로 뿌리내린 기업이다. 10-20명의 소규모집단은 강한 일체감을 보이는데 이나모리는 이 때부터 모든 공정과 부서를 공정별, 제품별로 몇 개의 작은 조직으로 나누고 하나의 중소기업처럼 스스로 경영을 맡겨 독립채산제로 운용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각 조직이 환경변화에 적응해 자기증식을 하도록 했기 때문에 ‘아메바조직’이라 이름 붙이고 이는 교세라만의 독특한 기업문화이자 조직론이 된다.
각 부서와 조직이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부서 이기주의’가 득세해서 내부 경쟁으로 회사가 얼마든지 붕괴될 수 있는 위험도 높다. 그래서 각 아메바는 상대방의 일을 배려하면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이 중요한데 교세라의 철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이다.
통상 일반 기업에서는 술마시고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노는 회식이 있는 반면에, 교세라는 ‘다과회’라는 모임을 통해 간단히 술한잔 하고 식사를 하면서 일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이나 일하는 방법, 경우에 따라서는 인생론까지 무엇이라고 의견을 주고받는 살아있는 모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68년 중소기업연구센터의 수상자로 선정되서 상금 100만엔을 받았는데, 이는 전사원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여 이나모리는 전사원에게 푸짐하게 음식을 돌리고 몇차례 회식도 했다. 몇 년 뒤 수상 회사의 모임에서 상금을 어떻게 섰는지가 화제가 되었는데, 연구개발에 썼다는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나모리는 ‘모든 사람들의 수고로 받은 상금이니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축배를 들며 먹고 마시는데 모두 써버렸다고’ 솔식하게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72년에는 전년도 월평균 매출이 5-6억엔이었는데, 9억엔 이상을 올리면 홍콩으로 전사원들이 해외여행을 간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9억 8000만엔 매출을 올리자, 1973년 1월 1300명 직원 전체를 데리고 전세기편으로 홍콩여행을 다녀왔다. 이나모리 회장은 ‘전원참가’가 회사의 신조라고 하면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서 사장까지 상하구별 없이 해외여행에 함께했는데, 73년 당시로서는 해외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굉장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교세라는 주로 M&A를 통해 사업을 확장해온 기업이라고 말하는데, 이나모리 회장은 이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나서서 기업을 인수합병한 일은 없다. 회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고, 상대회사 직원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섰던 것 뿐이다’고 말한다.
실제로 프린트복사기업체 부도직전의 미타를, 통신업체를, 네트워크회사를 인수해 본궤도에 올려놓는 저력을 발휘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65세에 위암 수술을 받고, 출가를 하게 된다. 그는 이미 기업을 하면서 수도승같은 인격도야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자기고백과 인생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업가라기 보다는 철학자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는 프랑수와 미슐렝의 책 ‘우리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를 읽으면서도 받은 느낌이다. 미슐렝은 미쉐린 타이어회사를 설립한 회장인데 그의 자서전적인 책도 읽어보면 이건 뭐 기업인이 아니라 프랑스 철학을 전파하는 사상가같다. 미슐렝 얘기는 나중에 다시 올리겠다.
아무튼 이나모리 가즈오, 일본에서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기업가, 돈을 벌어 성공한 사람이기 이전에 존경받는 기업가, 집요한 엔지니어 출신,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가진 돈과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혼다 소이치로도 이미 망자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현재 생존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일본 경영계에 살아있는 신화이자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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