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복잡하고 힘겨운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인생이 있다. 서경식 그리고 그의 형들 서승, 서준식... 형들 옥바라지 하다 결국은 홧병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시대적 아픔과 답답함을 부여안고 도망치듯 유럽을 돌아다니다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할 수 있는 미술이라는 대상을 만나게 된다. 작품의 감상과 해석을 통해 나와 같은 아픔의 역사를 겪으며 고생한 작가, 그리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을 받고자 몸부림치는 고뇌의 흔적이 여행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이 글을 쓸 때가 내 나이 때즈음이었을텐데... 그 고민과 아스라한 감정표현에 연민이 느껴진다.
이 책은 전문적인 미술서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행기도 아니다. 세계 곳곳에 반복되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도 비슷한 동일한 역사의 반복을 목격하며 ‘우리 집안 같은 인생을 산 사람들이 나뿐만은 아니구나...’하는 증거를 찾아 헤매는 순례자의 기록이다. 그의 이목을 집중시킨 미술,조각들은 하나같이 아픈 역사를 떠안고 있거나 아니면 소외된 사람들의 상처받은 심정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저자 서경식이 누구인가는 책에 쓰여진 그 자신의 고백을 들어보자.
왼쪽 사진 순서대로 서경식, 서준식/서승
"충청남도 출신 할아버지는 1928년 아직 대여섯살이던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 식민지 지배시대에 먹고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오셨다. 지하철공사 인부를 시작으로 밑바닥 노동에 종사하셨다. 1945년 일본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자, 조부모는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동생과 누이들도 할아버지를 따라 귀국했으나, 아버지만은 잠시 남아있기로 하셨다. 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아버지가 일본에서 생활비를 벌어서 보내주어야 한다는게 역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윽고 고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1950년 조선전쟁(6.25)이 발발한다. 결국 아버지는 귀국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할아버지는 고향 마을에서 돌아가셨다. 1951년 교또에서 태어난 나는 이런 연유로 생전에 할어버지 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1960년대 말 둘째와 셋째 형이 단절 되있던 고국 동포들과의 고리를 회복하기 위해 서울대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이전에 북조선 방문사실을 빌미로 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워 1971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감옥 속에 갇혀버렸다. 조사를 받는 중에 입은 큰 화상(서승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위해 그리고 혹시나 고문을 견디지 못해 허위자백을 할 경우 지인들이 간첩혐의로 고생할 것을 우려해 경유를 끼얹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사형선고,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잔혹한 고문, 생명을 건 옥중에서의 장기 단식투쟁 등... 그것이 조국의 현실이었다. 무려 10년 가까이나 면회와 차입을 위해 일본에서 한국 감옥을 들락거리신 어머니는 1980년 자궁암 재발로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 또한 3년 뒤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대학 3학년생(와세다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이 되었을 뿐인 스무살 때에 형들의 투옥사건을 만난 나에게는 형들을 구출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는 것이 그 이후의 ‘생활’이 되어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럽을 여행하면서 온갖 종류의 서양미술을 접하고서는 내 안에 무력감에 시달리다 생긴 응어리가 조금씩 표현되는 형상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8년 5월, 17년 간의 옥중생활을 마친 셋째형이 출옥했고, 2년 후 1990년 2월말 둘째형도 출옥했다. 우리 일가를 짓누르고 있던 운명은 하나의 구획을 지은 셈인데, 돌이켜보건대 잃은 것은 너무나 많고 또한 조국의 분단상태를 비롯하여 이러한 운명을 초래한 구도의 근본이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들은 아직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차라리 당연하다 싶다.(pp. 176-179)
내가 밑줄치며 읽게 된 내용들은 정작 미술 작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서경식 자신의 심정을 아련하게 표현한 내용들이다. 소개하고 싶어 몇문단을 타이핑해본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스페인)를 달리는 밤기차 속에서 새삼스럽게 나는 멀리 동쪽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우리의 ‘반도’를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 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1983년 11월 7일 이른아침, 현재는 프랑스가 된 바이욘느에 도착했다. 여기는 바스끄지방인데 1659년 삐레네조약에 의해 바스끄인은 스스로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스페인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뉘었다. 현재 대략 300만명의 바스끄인이 국경 양편에 나뉘어 살고 있다. 바스끄 민족운동은 프랑꼬 정권의 압제 아래에서도 굽힘없이 이어졌고, 프랑꼬 사후 가까스로1978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측 바스끄에 자치가 주어졌다. 그러나 완전한 분리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ETA(자유조국 바스끄)와 스페인 정부 사이에는 지금도 일종의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안다유 역에 내려 스페인측 출국검사소와 프랑스측 입국검사소를 차례로 통과하여 프랑스측 기차를 갈아타는 데, 아직 어린아이로 보이는 스페인 국경 경찰관은 일부러 위엄을 갖추려는 양 뚱한 표정으로 내 여권을 뒤적거리더니 자신의 가슴께를 옆으로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이고 나서, 손바닥을 처음에는 위로 다음에는 아래로 펼쳐 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꼬레아? 남이요 북이요?”
내 여권의 국적란에는 ‘Republic of Korea'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게 남을 말하는지 북을 말하는지 그는 모르는 것이다. 남한은 통과되지만 북한은 안되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오른손 엄지를 아래쪽으로 질러보였다. ’남‘이라는 뜻이다. 아릿한 아픔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 여기서는 조선이란 무엇보다도 분단국가로서 알려져있을테지. 어느 민족의 분단이 그 민족을 식별하는 지표가 되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 게다가 나는 방금 분단된 자기 민족의 어느 한쪽 나라에 자기가 소속한다는 뜻을 이국의 관헌 앞에서 승인한 것이다. 이 승강장 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저편에 기다리고 있는 기차를 타겠다는 단지 그것 뿐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면 본시 이곳에 살고 있는 바스끄인들 자신부터 자기네 땅의 이쪽 저쪽을 왕래하는데 일일이 두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주변을 오가는 바스끄인 누군가를 붙들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당신네 나라는 스페인인가 프랑스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쁘라도 미술관에서 지겹게 스페인의 독기를 쐰 뒤에 바스끄 땅에 서 있는 내가 무척 과민해져 있는 탓이리라.
내가 이곳 출신의 성공한 화가 레온 보나(Leon Bonnat, 1833-1922)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에는, 바스끄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자라고 빠리에서 성공한 그가 스스로 귀속처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스페인이냐, 프랑스냐, 아니면 바스끄냐?’하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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