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離散(이산)을 의미하는 헬라어다. 이스라엘 멸망이후 팔레스타인지역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된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이나 현재는 고향을 떠나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들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된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이다. 현재 일본사회에서는 ‘재일한국인’이라는 호칭과 ‘재일조선인’이라는 호칭을 애매하게 뒤섞어 사용하고 있는데,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출신자 혹은 북한국민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은 민족개념을 한국은 국가 개념이 포함된 용어이다. 일본에는 일본국적으로 귀화한 조선인이 있고, 북한국적을 갖고 일본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남한국적을 갖고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각각 어떻게 불어야 할 것인가? 게다가 더 아픈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함으로 인해 조선 사람들은 좋던 싫던 일본 국적을 지니게 되었다. 서경식의 할아버지는 조선인 신분이 아니라 일본국적을 갖고 1928년 일본에 건너온 것이다. 일본은 한일합방에 의해 국적상 일본인이 된 조선사람들에게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일본인과 동일한 헌신을 요구했다. 대략 70만에서 100만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내지의 탄광, 광산, 토목공사현장, 군수공장에 강제로 동원됐다. 심지어 일본군으로 차출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일본 패전시에는 적게 잡아도 230만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내지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47년 쇼와 천황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최후의 칙령을 반포한다. ‘재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외국인등록령이 선포된다. 외국인으로 간주된 재일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 수속을 할 때, 자기 국적을 기입해야 했는데, 1947년 당시 조선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활 점령 된 상태로 아직 독립국가 성립이전 상태라 국가가 없었다. 이 때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써넣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조선반도 출신,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그런데 미소 군정에 의해 강제 분할된 남북이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분단이 고착되어 버렸다. 1952년 한국전쟁(6.25)이 한창이던 그 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재일조선인들/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하게 된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식민지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사람, 강제로 연행된 사람, 그 자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모든 재일조선인이 한순간에 사실상 나라 없는 난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 없어진 나라 ‘朝鮮籍’인 채로 말이다.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의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외국인’으로 분류해 사회보장정책 대상에서도 제외해 버렸다. 이로인해 혜택은 전혀없는데 세금은 꼬박꼬박 내야 되는 희얀한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현재까지... 아무튼 당시 재일조선인의 실업률은 60%가 넘었다고 하는데 고생이 이로 말할 수 없는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정부는 또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일본은 북조선 양국과의 적십자협정에 근거해 1959년 재일조선인의 북조선으로의 ‘귀국사업’(망경봉호 타고 고향으로)이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가 저지른 북한으로의 귀국사업은 사실상 '인도주의‘를 위장한 추방정책이었다.
이후 1965년 박정희정권과 일본이 한일조약으로 수교를 맺음으로 인해 일본정부와 남한정부는 국적을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시키위해 합작(?)을 한 것이다. ‘조선적’을 유지하면 난민상태로 남아 불이익을 당하고, ‘대한민국’국적을 취득하면 남한 국민이라는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적’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의적으로 북한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자식의 국적에 흔적으로 남겨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있다. 역사의 아픔이다.
서경식의 경우 부모님이 남한국적으로 변경해서 ‘한국 국적’ 소지자가 되었다. 국적이 한국인 서경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에 집과 직장이 있지만, 한국 여권 없이 일본에서 해외로 나갈 수가 없다. 또 일본 정부의 재입국허가가 없으면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도 없다. 무슨 일일 생기면 외교상 보호해주는 곳은 일본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아니라 한국의 재외공관이다. 그런데 남한 정부는 형들 둘을 간첩혐의로 20년 동안 투옥했다. 부모님은 억울함으로 한을 품고 돌아가셨고, 서경식은 형들 구명에 20년을 보내버린다.
서경식
서경식의 독백을 들어보자니 가슴이 아련해 온다.
“재일조선인 대다수가 일본 식민지배의 결과 의도하지 않은 채 이 나라에 태어났다. 때문에 이 나라의 언어밖에 모르고, 여기밖에는 집이 없고, 여기밖에는 직장이 없고, 여기밖에는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하면, 삶의 기반이 여기 외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완곡하게 부드러운 말로, 어떤 때는 거친 목소리로 '싫으면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래도 여기밖에는 살 곳이 없어 나는 일본에 머물고 있다.”
디아스포라에게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가 분열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나도 이 신분(비자)문제를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러다 미국에 와서 보니 이 놈의 거류신분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체험했다. 뭐 현재 미국 거주는 외국인 즉 유학생신분으로 와 있으니 학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서 눌러 앉아 살려고 한다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교인들 중에 합법적으로 들어왔다가 불법체류자가 된 분들이 의외로 많다. 눈물로 기도하고 오바마정권의 이민개혁법안을 기다리는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같이 어울리고 그 회한을 듣고 그 삶을 이해하고 나니, 이 신분문제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닌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재일조선인들도 마찬가지다.
서경식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같은 다이스포라가 이 세상에 아주 많더라는 것이다. 두 사연만 살펴보자.
1. 갓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
1948년 1차 중동전쟁 때 열두살의 나이로 난민이 되었다. 신문사 교열사원, 교원 등의 직업을 거쳐 작가가 되었다. 이후 PFLP(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나 1972년 베이루트에서 차량폭탄 테러로 살해당했다. 1969년 쓴 ‘하이파에 돌아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데, 이런 얘기가 실려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인 중년부부가 20년만에 고향 마을 하이파를 방문한다. 하이파는 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다. 난민이 되어 고향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에서 살았다. 그러다 요단강 서안도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 당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사람은 3차 중동전쟁 때문에 다시 고향 하이파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찾아낸 고향집에는 폴란드에서 이주해온 나이든 유대인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 1차 중동전쟁 중 피난 길에 잃어버렸던 장남을 그 유대인 여성이 자기 아들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스라엘 군인이 되어버린 장남은 낳아준 부모인 두사람에게 ’20년간 그냥 울기만 했습니까? 눈물로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비난한다. 진정 고향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국이란 말이지,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곳이야... 나는 진짜 팔레스타인을 찾고 있는 거야. 추억 이상의 팔레스타인을. 공작 깃털이나 자식이나 계단 벽의 낙서가 아닌 진정한 팔레스타인을...‘
윤이상
1917년에 통영에서 태어나 1950년 유럽으로 건너가 현대음악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 박정희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유럽에 거주하는 다수의 한국인을 납치한 ‘동백림사건’ 때, 윤이상도 비밀리에 독일에서 서울로 연행되었다. 그의 뒷머리에 난 거미집같은 모양의 커다란 상처는 그 때 구금 중에 스스로 머리를 깨 자살하려다 생긴 상흔이다.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윤이상은 간첩혐의를 받고 법정에서 한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서독 정부를 비롯한 국제 여론의 엄중한 항의에 의해 연행된지 2년만에 석방되어 독일로 쫓겨난다. 서독으로 생환한 윤이상은 그 후 왕성한 작곡 활동을 계속하면서 현대음악의 세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쌓는 한편,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1980년 광주사태를 독일TV를 통해 보면서 눈물로 만든 곡이 ‘밤이여 나뉘어라’, ‘광주여 영원히!’라는 곡이다. 1980년 이후 한국정부는 윤이상에게 몇 번이나 귀국을 권유했다.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이미지향상을 기대하고 또 재외 민주화운동에 타격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윤이상은 진정한 민주화가 성취될 때까지 조국의 흙을 밟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 권유를 계속 거절한다. 드디어 군사정권시대가 막을 내리고 김영삼정부가 등장해 귀국이 실현될 조건을 갖추었다. 상황이 귀국 일보직전까지 진전되었는데 베를린을 떠나기 바로 전날 한국정부로부터 ‘과거의 행동을 반성한다. 앞으로 북한과 절연한다’는 두가지 태도를 표명하라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윤이상은 결국 이를 거부하고 귀국을 취소한다. 그 이듬해 윤이상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 통영앞바다를 다시 보지 못한 채, 향년 78세로 망명지 베를린에서 객사한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당한 아픔은 일본에서 조선인이 당한 아픔과 똑같다. 서경식은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 ‘펠릭스 누스바움’, ‘슈테판 츠바이크’, ‘애리히 볼프강 콘른골트’, ‘파울 첼란’ 등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책 제목에서 이미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다 설명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추방당한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예술세계에 몰입한 사람들의 작품들을 살펴보며 시대의 아픔을 반추해보는 ‘디아스포라 기행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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