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7일 목요일

Max Gallo 著, '나폴레옹 2권-戰場의 神', 문학동네

Max Gallo 著, '나폴레옹 2권-戰場의 神', 문학동네
Max Gallo의 책 순서를 따라 나폴레옹 시리즈 7편의 글을 구상하고 있다. 오늘은 그 두번째 편이다.

Roma 판테온 입구에서... (PanTheon의 건물구조와 그 내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나중에 '내가 가본 곳'에 로마편을 쓰면서 언급할 예정이다.)

2권은 이집트원정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처들어가면서 펼쳤던 정책은 Pan-theon정신이다. 로마에 가면 판테온이라 불리는 萬神殿이 있다. 로마는 유럽전역을 점령하면서 각 지역에 있는 신들을 전부 인정했다. 종교적 탄압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피식민지인들의 불만을 최소화 했다. 오히려 로마제국에 점령당했다는 피해의식을 줄여보고자 저마다 각 민족과 그 민족 나름의 종교생활을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 정신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적이 로마 판테온이다. 판테온은 말그대로 만신전, 즉 온갖 신들을 전부다 모신 사당이다. 로마제국 전역의 각 지역 신들 모두에게 일년 내내 돌아가면서 제사를 드리던 곳이다. 판테온은 다양한 로마제국 내의 여러 종교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정신이 극명하게 반영된 건축물이다. 나폴레옹은 국가를 구상하면서 철저히 로마제국은 벤치마킹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진군하면서 내건 포고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정복을 시도하고 있다. 이번 정복이 세계의 문명과 교역에 끼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운명은 우리 편이다. 우리와 함께 살게 될 민중은 마호메트 교도들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다. 마호메트가 그 예언자다’ 라고 믿고 있다. 그들을 윽박지르지 말라. 유태인과 이탈리아인들을 대했던 것처럼, 그들을 대하라. 랍비나 주교를 대하듯이, 그들의 무프티(이슬람 법률의 권위자)나 이맘(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대하라. 코란에 따른 제식이나 모스크에 대하여, 카톨릭 수도원이나 유대교 회당을 대할 때와 똑같이 관용을 배풀라. 로마군단은 모든 종교를 보호하였다. 그대들은 여기서 유럽과 다른 풍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당시 지도
      
나폴레옹은 자기 군대가 이집트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함으로 점령지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한다. 심지어는 나폴레옹은 이집트 점령 후, 튜닉복장에 터번을 두르고 나다니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복장을 본 부관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줄어드는데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은 이렇듯 통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야하는지 너무나 군중들의 심리를 잘 아는 여론조작의 귀재였다. 게다가 이집트의 부패하고 군림하는 지도층은 철저히 몰아냄과 동시에 기존계급을 타파하고 제국내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외침으로 민중들의 저항을 잠재웠다. 처들어간 곳마다 민중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자치정부(위성정권)를 수립함으로 간접통치 형식을 취한 것도 저항을 줄이는데 일조한 정책이다. 이집트에서는 이전에 있던 아랍 민병대를 경찰로 재조직하여 질서를 유지한다. 이 모든 것이 철저히 로마방식이다. 여담이지만 미국 또한 건국 초기 지도자들이 미국을 건국하면서 벤치마킹한 나라가 바로 로마다. 2006년 현재 미국은 점점 제국의 정책과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아메리카 제국...
      
Egyptology(이집트학)을 연구하기 위한 최적의 연구장소가 어디인지 아는가? 이집트 카이로와 영국 런던과 프랑스 빠리다. 카이로는 이집트 수도다. 그러나 이집트의 관한 대부분의 유물과 문헌, 자료들은 전부 런던과 빠리에 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사연은 이러하다. 18세기 대영제국시절 영국은 축척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이용해 이집트의 문물을 돈주고 사거나 아니면 훔쳐오는 방식으로 전부 런던으로 옮겨온 것이다. 영국처럼 프랑스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원정 당시 들고온(뺐아온?) 이집트 자료와 문물과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 모든 이집트 자료들이 파리에 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관한 애정이 있었다. 그 지역과 역사를 연구하기 원했고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조사하기 원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당시 군대만 조직한 것이 아니라, 백여명 이상의 이집트학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처들어갔다(이들을 중심으로 ‘카이로 학사원’이 설립된다). 왠만한 유물들은 전부 배로 실어왔다. 파리에 가보면 뾰족한 오벨리스크들이 광장마다 설치되어 있다. 전부 나폴레옹이 들고온 것을 파리 시민들을 위해 설치해놓은 것이다. 이것 또한 역사와 문물을 사랑하는 인물임을 공표하고자 하는 자기 과시욕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나폴레옹에 의해 이집트의 역사와 문명에 관한 연구는 급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 우뚯 세워진 오벨리스크... 전부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쌔벼온거다. 알렉산드리아를 하루만에 접수한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터키 투르크군대까지 괴멸시킨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생긴다. 바로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 넬슨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이미 분깃점을 넘어선 시점이라 군수품 보급과 병력보충의 바닷길로 막히는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마침내 프랑스로 개선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환호와 반응은 폭발적이다. 나폴레옹의 인기는 상종가를 쳤고,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의 인기는 바닥을 쳤다. 프랑스 민중들은 나폴레옹을 그들의 지도자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Timing의 귀재인 나폴레옹이 이런 분위기를 놓칠리가 있겠는가? 나폴레옹은 빨리 움직여야 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파리 권력핵심에 들어갈 것이라 믿었지만 그의 인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귀족과 정치인들에 의해나폴레옹은 끊임없이 견제당해, 결국 그는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경험이 있다. 대중들의 환호와 함성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 대중의 열광을 빨리 현실에 반영하고, 감정에 치우진 그들의 지지를 조직화해야한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푸셰, 탈레랑(       
이들은 전부 사제출신이다. 나폴레옹은 이들 셋을 ‘사제 출신 삼각편대’라 불렀다. 요즘 직책으로 설명하자먼 시에예스는 비서실장, 푸셰는 정보부장/내무장관, 탈레랑은 외교부장/외무장관의 역할을 담당한 나폴레옹 최측근 핵심 참모들이다. 이들이 전부 사제출신이라... 목회자 출신 정치지도자...ㅎㅎ 권력지향적인 목회자들과는 질이 다른 정말 똘똘하고 실력있는 참모들이었다.)
의 머리를 빌려서 군중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조직화/정치세력화 한다. 그다음엔 군부 내에 핵심인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유사시에 자기한테 적대적인 반응만은 막아야했다. 당시 17사단을 지휘하고 있었고, 수도 파리의 병력과 총재정부의 국민방위군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르페브르 장군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군대와 민중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나폴레옹을 원로원과 귀족, 정치인들이 깔아뭉개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친 것이다. 시간은 나폴레옹의 편이었다. 원로원의 가결로 드디어 나폴레옹은 프랑스 전군의 합법적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군사 쿠테타를 원하진 않았다. 폭력이 난무하고 체포와 구금이 동원되는 강제적인 쿠테타는 피하고자 했다. 군중들 사이에 나도는 나폴레옹의 인물평처럼 그는 ‘상식적인 인간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 "전투 없는 승리가 최상의 승리다. 위협만 가해도 이길 수 있는데 왜 폭력을 쓴단 말인가?" 이것이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나폴레옹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무혈 정권장악을 이룬다. 1799년 11월 9일 드디어 나폴레옹은 총재정부를 몰아내고 세명의 임시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다. 군총사령관, 원로원과 입법부를 장악하고, 여론을 등에 없고 프랑스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0세 때다. 12월 14일 제1통령으로 취임하여 권력을 잡은 후, 나폴레옹은 공화정 정신에 입각해 권력을 민중들에게 돌려주고, 국민들의 손에 의해 직접 지도자를 뽑을 수 있도록 모든 정치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투표에 붙인다. 나폴레옹의 새헌법은 12월 14일 찬성:3,011,007표, 반대:1,562표로 가결되어 공포되었다.
나폴레옹은 1800년 1월 16일 비밀 자문회의의 조언을 따라 73개의 신문 중 60개를 폐간하여 언론을 장악한다.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신문사 방송국을 장악하고, 이후 허문도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을 추진한 방식과 동일하다. 1월 18일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고 국가재정을 장악한다. 정권을 잡은 후 3-4달 만에 군사조직, 정치제도, 법령정비, 민심안정, 경제상황을 순식간에 전부 해치운 것이다. 권력찬탈의 쿠테타로 보기에는 너무나 치밀한 밑그림을 가진 준비된 정권교체였다.
 
Paul Delaroche, Napoleon Crossing the Alps, 1848.
2003년 가을 루브르박물관에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는 그림을 찾았다. 직접 찍었는데 영~ 상태는 별로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 그림은 Paul Delaroche의 그림보다는 아래의 David의 그림이 더 유명하다.
 
Napoleon Crossing the Alps painting by Jacques-Louis David
 
그해 늦 봄 5월, 이탈리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그 유명한 알프스를 넘어 진군한 전쟁이다. 밀라노에 입성한 후, 몬테벨로/마렝고/호엔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다. 그 결과로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와 뤼네빌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명실상부한 유럽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1801년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조인하고, 교황 비오7세와는 정교협약을 맺음으로 정치와 종교의 안정을 동시에 꾀하며 평화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여세를 몰아 1802년 이탈리아 공화국의 대통령을 겸직하고, 8월에는 종신통령에 취임한다. 1803년 2월 이탈리아 영토인 엘바섬과 피에몬테를 프랑스 영토에 병합하고, 스위스를 종속시켜며, 독일에서의 절대권력 출현을 막기 위해 독일 영토를 지맘대로 재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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