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게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이 한국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색한 내용을 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연재했던 것을 단행본으로 묶어서 낸 책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사색은 멈추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생각을 묶어놓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신영복선생의 기행 사색을 엿보는 재미로 볼만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의 역사의식을 훔쳐볼 수 있는 두 부분만 옮겨본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뒤집어보지 않으면 진실을 파악할 수 없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 신라의 명문장이 당나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훌륭한 사례로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런데 이걸 뒤집어서 신영복선생은 이렇게 본다.
討黃巢檄文(토황소격문): 孤雲 崔致遠이 당나라를 위협하여 일어난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이라 하더라도 황소가 당나라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궐기한 농민장수인 것을 감안한다면 최치원의 반농민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결국 그 격문은 이를테면 60년대 미국에 유학한 외국학생이 미국 일간지에 기고하여 성가를 얻은 베트남 북폭지지 칼럼과 다르지 않다.(p.102)
3천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民草들이었다. 낙화암의 3천 궁녀 전설은 애절한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패배한 백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조명하기 위한 교묘한 신라의 각색이다. 출진에 앞서 자기 손으로 처자식의 목을 벤 階伯 장군의 비장하지만 잔혹한 결단을 겨냥한 비난에 대해서도 잔혹하기는 오히려 어린 官昌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신라군의 사기를 돋운 金庾信의 책략이 더 잔혹한 것이 아닌가?(p.149)
2006년 5월 재만이랑 공주/부여 갔다가 낙화암을 내려다보며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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