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준비하던 97년 10월부터 유년부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면서 거의 매주 설교를 했다. 핑계지만 유년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3년 설교하고 이후 청년들 대상으로 5년 넘게 설교하다보니 내 설교에 극명하게 나타난 증상이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자니 표현이 쉽고 단순해졌다. 게다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다보니 표현이 굉장히 과격해졌다. 내 출신성분이 비천한데다 대학 입학해 서울 올라오기 전까지는 경산(내 고향이다. 경북 경산) 시장바닥에서 자란터라 표현이 쌍스럽다.
주변에서 내 설교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경상도 사투리 고쳐라’와 ‘상스럽고 과격한 표현을 삼가라’다. 엄밀하게 따져서 내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는 거의 없다. 있다면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못고친다. 10살 이전에 고향땅을 떠나 서울 왔으면 경기도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고착된 경상도 억양을 어쩌랴... Intonation...완화는 되겠지만 완전히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게 내 결론이다. 내 존재를 부인하는게 낫지 더 이상 억양 고치려고 말꼬리 올리는 짓은 그만하고 싶다. 또하나 표현이 쌍스럽고 과격하다는 지적... 이것 또한 불만이다. 나는 소위 상류층의 고상한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시장바닥에서 구르며 질퍽한 아지매들의 입담과 과격한 아저씨들의 욕설에 둘러싸여 자랐다. 나는 이들을 천박하다고 빈정거리는 비웃음을 참을 수 없다. 얼마나 정이 많고, 사람 사는 냄새나는 말투와 표현법인데 이를 싸잡아 삼류문화로 몰고가는 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내가 들어도 필요이상으로 욕을 써대는 것은 나도 듣기 거북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적나라한 표현법은 오히려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무식한 것들이 상류문화권에 속한 사람인양 고상한 척하며 현학적인 용어를 써가며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역겹다. 조금만 심도 깊은 질문을 던져보라 그들의 얄팍한 지적 수준은 금방 들통난다. 비록 투박한 말투에 간간히 쌍욕이 섞여 나올지언정.. 나는 진심이 묻어나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진심이 통하는 관계를 맺고 싶다. 격식을 차리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치적 관계 형성은 딴 사람한테나 알아봐라. 나는 싫다.
진짜 양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그 내용을 문제삼지, 표현법의 천박성을 두고 뭐라하지 않는다.
노무현 화법이 매도당할 때마다 마치 내가 욕먹는 것 같아서 아주 속이 쓰렸다. 말의 진정성을 문제 삼아야지 대학졸업 못한 상고출신 무식쟁이 말투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자들(?)의 교묘하고 의도적인 정치적 언론 플레이...정말 지겹다.
Stephen King의 책을 보다가 아니나 다를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를 만나서 울매나 기분이 좋던지..
그의 글을 직접 옮겨본다.
“만일 내가 헨리 제임스나 제인 오스틴처럼 사교계의 멋쟁이나 말쑥한 대학생들에 대해서만 쓰는 작가였다면 욕설이나 상소리를 쓸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미국 중하류 계층에서 자랐다. 따라서 내가 가장 솔직하고 자신있게 묘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부류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손가락을 찧었을 때, ‘어머나 아파라!’가 아니라 ‘이런 제기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를 천박한 무식쟁이라고 비난하는 비평기사를 보거나 그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20세기 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 ‘The Octopus', 'The Pit', 'McTeague' 등을 집필한 프랭크 노리스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노리스는 주로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급에 관한 책을 썼다. 노리스가 쓴 최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맥티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치과의사이다. 노리스의 책들은 상당한 사회적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반응은 냉담하고 경멸적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관심 없소. 난 굽실거리지 않았고. 진실을 말했을 뿐이요.” 표현이 추하든 아름답든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한 방 안에 불어드는 한 가닥 신선한 바람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말이 점잖으냐 상스러우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자신의 작품이 진실하게 들리기를 바란다면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p.231-232)
주변에서 내 설교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경상도 사투리 고쳐라’와 ‘상스럽고 과격한 표현을 삼가라’다. 엄밀하게 따져서 내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는 거의 없다. 있다면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못고친다. 10살 이전에 고향땅을 떠나 서울 왔으면 경기도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고착된 경상도 억양을 어쩌랴... Intonation...완화는 되겠지만 완전히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게 내 결론이다. 내 존재를 부인하는게 낫지 더 이상 억양 고치려고 말꼬리 올리는 짓은 그만하고 싶다. 또하나 표현이 쌍스럽고 과격하다는 지적... 이것 또한 불만이다. 나는 소위 상류층의 고상한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시장바닥에서 구르며 질퍽한 아지매들의 입담과 과격한 아저씨들의 욕설에 둘러싸여 자랐다. 나는 이들을 천박하다고 빈정거리는 비웃음을 참을 수 없다. 얼마나 정이 많고, 사람 사는 냄새나는 말투와 표현법인데 이를 싸잡아 삼류문화로 몰고가는 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내가 들어도 필요이상으로 욕을 써대는 것은 나도 듣기 거북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적나라한 표현법은 오히려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무식한 것들이 상류문화권에 속한 사람인양 고상한 척하며 현학적인 용어를 써가며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역겹다. 조금만 심도 깊은 질문을 던져보라 그들의 얄팍한 지적 수준은 금방 들통난다. 비록 투박한 말투에 간간히 쌍욕이 섞여 나올지언정.. 나는 진심이 묻어나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진심이 통하는 관계를 맺고 싶다. 격식을 차리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치적 관계 형성은 딴 사람한테나 알아봐라. 나는 싫다.
진짜 양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그 내용을 문제삼지, 표현법의 천박성을 두고 뭐라하지 않는다.
노무현 화법이 매도당할 때마다 마치 내가 욕먹는 것 같아서 아주 속이 쓰렸다. 말의 진정성을 문제 삼아야지 대학졸업 못한 상고출신 무식쟁이 말투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자들(?)의 교묘하고 의도적인 정치적 언론 플레이...정말 지겹다.
Stephen King의 책을 보다가 아니나 다를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를 만나서 울매나 기분이 좋던지..
그의 글을 직접 옮겨본다.
“만일 내가 헨리 제임스나 제인 오스틴처럼 사교계의 멋쟁이나 말쑥한 대학생들에 대해서만 쓰는 작가였다면 욕설이나 상소리를 쓸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미국 중하류 계층에서 자랐다. 따라서 내가 가장 솔직하고 자신있게 묘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부류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손가락을 찧었을 때, ‘어머나 아파라!’가 아니라 ‘이런 제기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를 천박한 무식쟁이라고 비난하는 비평기사를 보거나 그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20세기 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 ‘The Octopus', 'The Pit', 'McTeague' 등을 집필한 프랭크 노리스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노리스는 주로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급에 관한 책을 썼다. 노리스가 쓴 최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맥티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치과의사이다. 노리스의 책들은 상당한 사회적 반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반응은 냉담하고 경멸적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관심 없소. 난 굽실거리지 않았고. 진실을 말했을 뿐이요.” 표현이 추하든 아름답든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한 방 안에 불어드는 한 가닥 신선한 바람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말이 점잖으냐 상스러우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자신의 작품이 진실하게 들리기를 바란다면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p.23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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