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6일 수요일

황인경, ‘소설 목민심서’ 삼진기획

황인경, ‘소설 목민심서’ 삼진기획

茶山/與猶堂 丁若鏞
정약용, 조선 경세학의 대가, 실학을 우리 실정에 맞게 집대성한 사람이다. 조선 중기 정조시대를 살았던 인물인데, 민초들의 현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한 선비이자 탁상공론으로 쌈박질만 하던 당시 시대상황에서 그들보다 더 깊고 넓고 높은 학문적 경지에 다다랐으나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실제적인 학문을 꽃피우고자 애썼던 실천가이다. 천주학을 접하면서 서양문물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동양의 틀을 뛰어 넘고자 했던 인물 바로 그가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지적 편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의 연구와 관심분야는 너무나 방대하여 한 인간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지적 편력이라고 하기에는 무슨.. 백과사전같다. 박학다식도 이정도면 거의 편집증... 정신병이라 할만하다.

정약용과 관련된 대표적 건물이 두개가 있는데, 그의 아호도 이 집 두개와 맞물려 있다. 하나는 전남 강진에 유배 갔을 때 기거했던 茶山草堂이고, 또 다른 집은 그가 태어난 곳에 말년에 집을 짓고 반평생을 보낸 與猶堂이다. 이 두 집건물 때문에 그의 호는 다산, 여유당이 된 것이다. 다산은 인근에 차나무가 많아 차를 만들어 손님 대접하면서 붙인 이름이고, 여유당은 老子의 말에 ‘與여! 겨울에 냇물을 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與가 의심이 많은 동물이름이고 猶는 겁이 많은 동물이름인데, 결국 사방을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담겨 있는 집이름이다. 한평생 온갖 음해와 시샘으로 시달림을 당했던지, 餘裕(여유)가 없는 자신의 인생을 與猶(여유)라고 지었을까... 정약용의 일생을 통해 드러나는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與猶이다. 즉 털어서 먼지도 없는 삶을 산 것이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이 18년간 유배를 당한 곳인데 산자락이 햇볕도 잘 들지 않고 눅눅하다. 지금은 기와집이 지어져 있지만 정약용 당시는 볼품없는 흙집에 초가지붕이었을 것이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나무뿌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계단이 인상적이었다.
오륜교회 청년부 사역하던 시절 녀석들과 함께 팔당댐 지나 남한강변에 있는 봉쥬르라는 식당 겸 까페에 자주 갔었다. 값도 싸고, 모닥불에 고구마 구워 먹는 맛이 그만인 곳이다. 항아리에 담아주는 수제비도 맛있다. 무엇보다 철길 옆이라 아들 녀석이 유리창 넘어로 보이는 기차 지나가는 모습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바로 봉쥬르 조금만 더 지나면 남양주 능내리에 다산생가가 있다. 물론 실제 여유당은 1925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 이를 1986년 조선 선비집으로 복원한 건물이 지금 들어서 있다. 봉쥬르만 가지 말고 한번 쯤 정약용 생가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 참 무덤도 옆에 있다.
 
황인경
황인경이라는 아줌마 작가가 맘먹고 10년 집필 끝에 내놓은 정약용 역사소설이 ‘목민심서’이다. (이 책 엄청 팔린걸로 알고 있다) 조선의 목민관(공무원)으로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부임부터 떠날 때까지... 얼마나 꼼꼼하게 지침서로 기록해 놓았는지 나는 목민심서를 창비에서 출간된 것을 갖고 있고,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펴낸 걸로 읽었다. 지금도 역시 유효한 리더십관련 서적이라 생각한다. 현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 치민이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할 당시 조선인 친구 박헌영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받아 읽기 시작했다는데... 그래서 호 치민이 최고권력자에 올랐으면서도 그토록 청렴하고 친근하고 고고할 수 있었나보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에 도전하기 전에 ‘소설 목민심서’를 먼저 재미로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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